[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어리버리한 월급쟁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월급쟁이들이 뿔났다. 내심 ‘13월의 월급’을 기대했던 연말정산이 세금폭탄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줬다 뺏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부 당국자들은 똑똑히 알았을 듯싶다.

‘어리버리(하다).’ 말이나 행동이 다부지지 못하거나 그러한 사람을 가리킨다. ‘저 어리버리 왜 왔냐?’ ‘어리버리한 놈’처럼 쓴다. 13월의 세금폭탄은 월급쟁이를 봉도 모자라 어리버리한 사람으로 취급해서 벌어진 일이다. 허나, ‘어리버리(하다)’는 우리 사전에 없다. ‘어리바리’가 표제어로 올라 있다.

어리바리의 ‘어리’는 ‘어리석게’라는 부사다. ‘바리’는 어원을 구명하기가 쉽지 않으나 ‘어리’의 호응어(첩어)로 볼 수 있다. ‘어리바리’에 ‘-하다’가 붙은 게 ‘어리바리하다’이고, ‘어리바리하다’는 ‘바’의 ㅏ가 ㅓ로 변하면서 ‘어리버리하다’가 됐다(조항범,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그런데 이상하다. 언중은 어리바리하다와 어리버리하다를 ‘말과 행동이 얼뜨다’고 비슷한 뜻으로 쓰고 있지만 사전은 그렇지 않다. 어리바리를 ‘정신이 또렷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어 몸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실생활에서 쓰는 ‘어리바리’와 사전적 정의는 많이 다르다. 어리버리는 고치기 힘든 품성 같은데, 어리바리는 일시적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푹 쉬고 밥만 잘 먹으면 나을 것 같다.

우리 사전이 입말 어리버리와 비슷한 뜻으로 올려놓은 표제어는 ‘어리보기’다. 생경하다. 실생활에서는 잘 쓰지 않는 화석어다. 오히려 어리보기의 뜻풀이에 동의어로 올라 있는 ‘머저리’나 ‘다부지지 못하여 어수룩하고 얼빠진 데가 있다’란 뜻의 얼뜨기, 꺼벙이가 쉽게 와 닿는다.

어리숙하다와 어수룩하다는 복수표준어다. 어리버리(하다)도 많은 사람이 즐겨 쓰는 말이므로 존중해야 옳다. 입말과 사전적 의미가 동떨어진 ‘어리바리하다’의 뜻풀이에 ‘말과 행동이 얼뜨다’는 풀이도 덧붙이는 걸 검토할 때가 됐다. tvN 코미디빅리그 ‘썸&쌈’의 ‘어리바리 신입사원 씨’라는 표현에서는 ‘귀엽다’는 의미도 엿보인다. 말의 변화는 이처럼 빠르다.

정부가 소급 적용해 세금을 돌려주는 건 2008년 유가환급 때 말고는 전례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고마워할 월급쟁이가 얼마나 될까. ‘월급쟁이는 어리버리한 호갱’이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월급쟁이#연말정산#세금폭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