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67>시래기 한 움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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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 한 움큼 ―공광규(1960∼ )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 치는 식당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미운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점심 잘 먹고 나와서 직장으로 돌아가던 회사원이 ‘찬 유치장 바닥에’ 던져지기까지의 전말이다. 독자에게 별 슬픔도 웃음도 감동도 주지 않는 사건인 데다 유명 인사가 연루되지도 않았으니 신문 사회면의 ‘휴지통’ 기삿감도 안 될 테다. 이 정도에 주목하기에는 더 질퍽하고 난자한 소동이 끊이지 않는 세상.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기가 막힌 사태다. 사건의 전달자는 ‘평생 주먹다짐 한번 안 해본 산골 출신’ 회사원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다. 그들에게 상대방은 애초 ‘한몫 보려’ 작정하고 억지를 부리는 천하에 못된 인간인 것. 그런데 우리 구경꾼은 식당 주인 입장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창 바쁠 점심시간에 나와 있을 정도로 손님이 없는데, 필경 다른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한 인간이 제 ‘재산에 손을’ 댄다! 그동안 그 담벼락 시래기를 집적거린 사람이 한둘이 아닐 터, 이 현장은 이래저래 부글거리는 식당 주인의 심기가 울컥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일 테다. 시래기를 한 움큼 빼지 말고 그냥 담벼락에 둔 채 코를 댔으면 좋았을 회사원은 유치장 바닥에서 선잠에 들어 흉몽 같은 현실의 발단일 그리운 정경을 꿈에서 본다. ‘시래기 한 움큼’이 한 사람에게는 ‘그리움’이고 한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며 ‘재산’이다. 상대편을 이해할 이유도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도시의 삶이란 종종 일촉즉발일 테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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