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배극인]시험대 오른 아베 총리의 ‘강한 일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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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도쿄 특파원
배극인 도쿄 특파원
일본은 눈치를 보면서도 아랍의 손을 들었어야 했다.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에 석유 수출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1973년 10월 시리아와 이집트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과 이로 인한 제1차 오일쇼크 때의 얘기다.

그해 11월 일본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에게 이스라엘 지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다나카 총리는 “일본은 중동에 석유를 의존하고 있다. 석유가 끊어지면 미국이 대신 공급해줄 것인가”라고 맞받았다. 아사히신문은 키신저 장관이 아무 말도 못 했다고 전했다. 베트남전쟁으로 체력이 소진된 미국의 한계였다. 일본은 이후 니카이도 스스무(二階堂進) 관방장관이 모든 점령지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부총리는 중동 산유국으로 달려가 ‘구걸 외교’를 펼쳤다.

일본의 친(親)아랍 노선은 1991년 걸프전을 계기로 바뀐다. 옛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해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유엔 결의를 주도해 쿠웨이트에서 이라크를 몰아내기 위한 다국적군을 꾸렸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일본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머뭇거리다가 20억 달러를 꺼냈다. 하지만 “그게 뭐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일본은 결국 130억 달러의 거금을 헌납했지만 워싱턴에선 “ATM(현금자동입출금기) 외교”라는 조롱이 쏟아졌다. 그 당시 일본 신문의 만평에는 미국과 한국의 두 장신(長身)이 농구하는 옆에서 키 작은 일본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이 실렸다.

그때의 트라우마로 일본은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1992년 6월 통과된 국제평화협력법이었다. 이후 일본은 캄보디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지의 유엔평화유지활동(PKO)에 적극 동참했다. 자위대 해외 파병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적극적 평화주의’는 이처럼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 확대로 시작됐지만 오래지 않아 변질됐다. 오랜 경기 침체로 누적된 국민의 스트레스와 중국의 부활을 자양분으로 국가주의 세력이 힘을 키운 것이다. ATM 외교는 2012년 말 아베 신조(安倍晋三) 2차 내각 출범과 함께 근육질 외교로 치닫게 됐다. 이 과정에서 중동이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고 자위대의 활동 반경을 넓힌다는 명분으로 국민의 뇌리에 각인된 석유 위기를 자극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 원유의 9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이 큰 타격을 받는다는 홍보가 이어졌다.

아베 총리가 새해 첫 해외 방문지로 중동을 선택한 것도 전략적인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각의(국무회의)에서 결정한 집단적 자위권을 실제로 행사하기 위해서는 올해 봄부터 안보 관련 법제를 재정비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분위기 조성이 필요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거부감이 높아지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지뢰가 터졌다. 중동 순방길에 오른 아베 총리가 17일 ‘이슬람국가(IS)’와 싸우는 주변 각국에 2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자마자 IS가 기다렸다는 듯 일본인 인질 동영상을 유포해 아베 총리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 IS는 그를 직접 겨냥해 “십자군전쟁에 참여했다”고 비판했다.

일본 언론은 일단 정부 대응을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사태가 일단락되면 아베 총리의 ‘강한 일본’ 노선은 논란에 휩싸일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서는 아베 총리가 자국민이 인질로 붙잡혀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중동으로 달려갔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일본인 인질 사태는 후폭풍이 더 거셀 것으로 전망된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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