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트렌드]색칠공부 책에 콩닥콩닥… 추억 입힌 ‘36색 힐링’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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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처럼 노는 ‘귀요미’ 어른들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찾은 고객들이 서점에 마련된 색칠공부 코너를 찾아 책을 살펴보고 있다. 최근 서점에는 90여 종의 어른용 색칠공부 책이 나와 인기를 얻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찾은 고객들이 서점에 마련된 색칠공부 코너를 찾아 책을 살펴보고 있다. 최근 서점에는 90여 종의 어른용 색칠공부 책이 나와 인기를 얻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직장인 정지원 씨(34·여)는 지난해 11월 서점에 갔다가 ‘마음으로 거니는 명화의 숲’이란 책을 샀다. 세계적인 명화의 스케치 위에 색을 더하는 이른바 ‘컬러링 북(색칠공부 책)’이다. 정 씨는 우연히 서점 한 코너에 가득 찬 색칠공부 책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고, 보는 것을 좋아했기에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정 씨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시간도 잘 가고 뜨개질하듯 마음도 편안해진다”고 말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도 있었다. 그는 “좋아하는 명화를 따라 그리다 보면 새로운 시각으로 그림을 해석하게 된다”며 “나만의 감상법으로 그림을 대할 수 있는 점도 컬러링의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20, 30대 직장인들 사이에서 컬러링, 이른바 ‘색칠공부’의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7∼12월)에 시작된 색칠공부 열풍은 새해에도 계속 번지는 분위기다. 이제 색칠공부는 어린이만의 전유물이 아닌 셈이다.

극심한 소비 침체에 빠진 유통업계에서는 유일하게 잘되는 매장으로 ‘캐릭터 매장’을 꼽는다. 스마트폰 메신저 이모티콘이 그려진 문구류, 이모티콘 인형을 사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선다. 물론 줄을 선 이들은 대개 어른이다. 전문가들은 이제 어른과 아이라는 잣대로 취미와 취향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어른을 위한 취미 콘텐츠 자체가 정교하게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유통업계에서는 모바일 메신저 캐릭터 상품이 돌풍 을 일으키고 있다. 현대백화점 제공
유통업계에서는 모바일 메신저 캐릭터 상품이 돌풍 을 일으키고 있다. 현대백화점 제공
색칠에 빠진 어른들

컬러링 북의 인기는 세계적이다. 그런데 한국이 유독 유별나다고 한다. 순식간에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돌풍의 시작은 지난해 8월 말 출간된 ‘비밀의 정원’이다. 영국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조해너 배스퍼드가 펴낸 이 책에는 굉장히 정교한 스케치가 담겨 있다. 출간 후 지난해 9월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6위에 오르더니 10월 2위, 11월 2위에 이어 12월에 1위에 올랐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올해 1월에도 주간 베스트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밀의 정원이 돌풍을 일으키자 서점마다 색칠공부 코너가 따로 마련되기 시작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비밀의 정원 출간 이후 무려 77종의 색칠공부 책이 서점에 등장했다.

색칠공부 책의 부상과 함께 색연필도 인기다. 인터넷 오픈마켓 옥션에서 색연필과 물감, 만년필 등 관련 제품의 지난해 9월∼올해 1월 10일 판매는 전년도 같은 기간 대비 3배 늘었다. 원래 색연필 물감 등의 주 구매자는 학부모인 30, 40대로 전체의 80%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 기간 20대 구매자가 전년 동기 대비 140% 급증하기도 했다. 옥션 관계자는 “색칠 전문 색연필인 ‘스테들러 36색 색연필’로 시작해 좀 더 전문성 있는 색연필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어른들의 색칠공부가 한국에서 이토록 빠르게 자리 잡게 된 배경이 뭘까.

안민영 씨(33·여)는 “마인드 컨트롤에 좋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해 3월 프랑스 파리 여행 중 우연히 서점에서 ‘컬러 아트 세러피 북’을 발견하며 색칠에 빠져들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안 씨는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파버 카스텔 36색’ 색연필을 구입했다. 안 씨는 “지난해 말에는 ‘비밀의 정원’도 사서 그리고 있다”며 “임신 중이라 태교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귀여움’이 대세가 되다

“저기 제조유통일괄형(SPA) 매장보다 이 매장 매출이 더 높아요.”

660m²(약 200평)가 넘는 대형매장과 고작 60m²(약 18평)짜리 매장. 10배나 더 큰 매장이 소규모 매장보다 구매객 수, 매출에서 모두 밀린다고 백화점 직원이 귀띔한다. 현대백화점 서울 신촌점 유플렉스관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인공은 바로 카카오톡 캐릭터 상품을 파는 ‘카카오 프렌즈’ 매장이다. 지난해 10월 문을 열자마자 평균 월 매출이 5억 원이 넘었다. 비슷한 규모의 매장은 대개 월평균 1억∼2억 원만 내도 ‘대박’이라고 한다.

하루 평균 1000명이 찾는 이 매장의 평당 매출은 약 3000만 원. 웬만한 프리미엄 패딩 매장보다 1.2배 정도 높다는 게 백화점 측의 설명이다. 한수영 현대백화점 커뮤니케이션팀장은 “스마트폰과 모바일 메신저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고객들의 연령대가 올라가면서 관련 제품이 다양한 연령대의 고객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이 카카오를 앞세운다면 롯데백화점은 네이버의 모바일 메신저 ‘라인’ 캐릭터 상품 매장을 앞세운다. 롯데백화점 서울 본점 영플라자 1층 쇼윈도 명당자리를 라인이 차지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변화를 발 빠르게 따라가는 유통업계는 “‘귀여움’이 어른들의 지갑을 열게 한다”고 말한다. 소비 침체로 의류나 잡화 매출은 떨어지는데 동심을 떠올리게 하는 제품들은 히트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서울 석촌호수에 뜬 거대한 고무인형 ‘러버덕’ 열풍도 이 같은 트렌드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러버덕 관련 상품들은 품절돼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아동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갈 때 강제로 좋아하던 장난감, 놀이, 취미를 빼앗기게 된다”며 “그때 실컷 누리지 못한 애틋한 감정이 있는 데다 최근 젊은층이 취업난 등으로 스트레스를 풀 곳을 찾다 보니 관련 상품들이 인기를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키덜트’ 시장 커진다

최승원 쎈토이 대표(43)는 “취미가 일이 됐다”고 한다. 그는 15년 동안 베어브릭(곰 모양의 인형), 피겨 등을 모았다. 최 대표는 “외로운 유학 시절 하나씩 사들인 베어브릭이 1500여 개 된다”며 “귀여우면서도 단순하고, 수많은 기업들과 협업해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베어브릭은 질리지가 않는다”고 했다.

최 대표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2012년 아트토이(예술적 가치가 있는 장난감) 등을 기획 전시하고 판매하는 쎈토이를 창업했다. 지난해 8월에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국내 최초의 ‘키덜트 박람회’ 개최를 주도하기도 했다. ‘키덜트(Kidult)’는 아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로 어릴 적 취향을 간직한 어른을 말한다. 최 대표는 올해 3월 경기 여주에 그동안 모은 20억 원어치의 수집품으로 박물관을 열 예정이다. 그는 “슈퍼맨, 아이언맨,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고 자란 3040세대가 경제력을 갖춘 어른이 되자 관련 제품을 소비하며 힐링하려 한다”고 말했다.

키덜트란 용어는 1985년 미국 뉴욕타임스가 기사화하면서 널리 쓰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적으로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하는 ‘피터팬 증후군’과 연결지어 쓰이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특정 소비계층을 일컫는 의미로 확대됐다.

국내 키덜트 시장은 약 5000억 원 규모로 추정된다. 최 대표처럼 새로운 사업을 확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에는 젊은층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서 ‘힐링 상품’이 쏟아져 키덜트 시장을 넓히고 있다. 베스트셀러 ‘비밀의 정원’의 국내판에는 원서에는 없는 ‘안티-스트레스’라는 말이 적혀 있을 정도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보기술(IT)의 발달로 과거 ‘유치하다’고 여겼던 게임, 만화영화 등이 더욱 정교하게 발전해 왔다”며 “어릴 때 좋아하던 만화, 그림 등을 어른이 좋아한다고 나쁘게 보던 사회적 편견도 사라졌다. 과거 남녀 구별이 무의미한 ‘유니섹스’ 열풍처럼 어른과 아이를 모두 사로잡는 ‘유니’ 소비계층은 계속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형도 SK플래닛 광고부문 랩장은 “주 소비층인 20, 30대들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게 하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기 어린이 문화를 활용한 복고 마케팅을 전개하는 등 기업들은 새로운 마케팅 기회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키덜트#추억#색칠공부#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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