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 아모, USA… 이 순간이 오길 50년동안 기다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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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와 수교에 들뜬 쿠바 르포 <상>
反美깃발 내리고 경제도약 꿈꿔… 21일부터 美와 첫 고위급 수교회담
휴양도시 아바나 관광부활 기대… 식당선 ‘퇴폐 논란’ 팝송 흘러나와



아바나=신석호 특파원
아바나=신석호 특파원
지난해 12월 17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쿠바와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지 한 달 가까이 된 14∼17일 방문한 아바나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다.

우선 손님맞이 준비가 한창이었다. 21, 22일 아바나에서는 미국과 쿠바 양국 고위 당국자들이 모이는 역사적인 첫 회담이 열린다. 로버타 제이컵슨 국무부 서반구 담당 차관보가 이끄는 미국 대표단이 아바나에 와서 국교 정상화와 대사관 재개설, 이민제도 정비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아바나 곳곳에서는 미국 손님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배려한 흔적이 엿보였다.

길게 늘어진 해변도로 말레콘 방파제는 아바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소다. 근처에서 대사관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 이익대표부 건물에는 평소 드리워져 있던 수십 개의 검은 깃발이 모두 내려지고 없었다. 깃발은 ‘대미항전’ 도중 목숨을 잃은 쿠바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정치적 상징물이었지만 이제 깃대만 남은 상태로 변했다.

1959년 혁명 직전까지 사용됐던 옛 쿠바 국회의사당 건물도 3월 재입주를 앞두고 개보수가 한창이었다. 쿠바가 미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 아래 있던 1929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워싱턴 연방의회와 똑같이 생겼다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었다.

15일 해질 무렵 말레콘 방파제 위에서는 결혼 축하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커플이 친구 몇 명에게 둘러싸여 쿠바 특산품인 럼주 한 병과 맥주 몇 캔으로 축하연을 벌이고 있었다. 기자가 신랑에게 다가가 “미국과 관계 개선에 나선 쿠바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고 하자 그는 대뜸 럼주를 병째 권하면서 “테 아모(사랑해요), USA. 쿠바 사람들이 50여 년 동안 너무도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쿠바는 물론이고 미국 두 나라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약 7년 전인 2007년 11월 박사학위 논문 자료 수집차 아바나에 온 적이 있다. 그때와 비교해보면 쿠바인들의 태도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그때는 아바나 어디를 가도 미국에 대한 적대적인 말들이 들렸다.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후안 트리아나 아바나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인들이 다시 들어오면 혁명 이전처럼 쿠바의 값진 재산과 예쁜 여성들을 독차지할 것”이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밑바닥 민심에서부터 지식인들까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쿠바 3종 택시 쿠바 아바나 시내 거리에서는 자영업 택시가 눈에 많이 띈다. 노란색에 ‘택시’라는 
간판을 단 서구식 회사 택시에서부터 1950년대 중고차를 수리해 고친 자가용 택시, 자전거와 인력거 택시까지 다양한 종류의 택시가
 돌아다닌다. 쿠바 정부는 2010년 말 택시 자영업을 허용했다. 아바나=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쿠바 3종 택시 쿠바 아바나 시내 거리에서는 자영업 택시가 눈에 많이 띈다. 노란색에 ‘택시’라는 간판을 단 서구식 회사 택시에서부터 1950년대 중고차를 수리해 고친 자가용 택시, 자전거와 인력거 택시까지 다양한 종류의 택시가 돌아다닌다. 쿠바 정부는 2010년 말 택시 자영업을 허용했다. 아바나=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우선 가장 반기는 쪽은 관광업계. 아바나 시민들은 이번 조치로 혁명 이전처럼 ‘하와이(자연경관), 라스베이거스(카지노), 파리(역사)’가 어우러진 중남미 최고 관광 휴양도시로 아바나가 부활할 것이라는 기대가 역력했다. 지난해 쿠바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300만 명으로 25억 달러에 달하는 관광수입은 서비스 수출(의사 교사), 해외 친척 송금에 이은 쿠바의 세 번째 외화 획득 사업이다.

아바나 민박집 ‘카사 엔 미라마르’의 주인 리오클레스 토라블라스 씨는 “쿠바에는 좋은 호텔이 많지 않다. 앞으로 우리 집을 찾는 미국인 방문객이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정보보안 관련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그는 아바나에서만 고급 민박집 3채를 운영하는 ‘큰손’이다.

7년 전 방문했을 때 자주 들렀던 식당 ‘비스타마르’는 이미 초대형 수영장을 갖춘 소형 리조트로 변해 있었다. 저녁엔 기타를 치며 미국 팝송 ‘호텔 캘리포니아’를 부르는 쿠바 가수도 만날 수 있었다. 한때 반미혁명의 성지라 불리던 아바나에서 미국에서도 퇴폐 논란을 불렀던 노래를 듣다니…. 이런 곳은 아바나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한 맥줏집은 쿠바인지 미국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대형 스크린에서 무희들의 현란한 군무(群舞)가 펼쳐지는 가운데 바텐더는 기자 일행에게 위스키와 맥주를 서빙했다. 또 흰색과 빨간색 원피스를 맞춰 입은 10여 명의 젊은 쿠바 여성이 햄버거와 피자 등을 날랐다. 미국식 스포츠바에 맥도널드를 합친 쿠바식 복합 패스트푸드점 같았다.

정훈 KOTRA 아바나무역관 부관장은 “자영업자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 철폐 이후 경쟁이 이뤄지면서 유명 맛집들이 체인점을 내는가 하면 1박에 최고급 국영호텔 수준인 200태환페소(CUC·외국인들이 외화를 내고 바꿔 사용하는 화폐·약 200달러)에 이르는 호화 민박집도 성업 중”이라고 전했다.

기자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4박 5일 일정의 쿠바 여행을 시작한 멕시코인 프레사 코르케 씨는 “미국 쿠바 양국의 관계 개선은 멕시코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14일 멕시코시티에서 아바나로 들어온 멕시코항공 보잉737기는 좌석 130석이 거의 모두 들어찼다.

미국과 쿠바 관계 정상화는 관광업의 부활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쿠바 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인의 쿠바 송금 한도가 현재 500달러(약 55만 원)의 4배인 2000달러(약 220만 원)로 늘어난다. 미 국무부는 최근 미국에서 쿠바로 송금되는 금액이 매년 20억 달러(약 2조2000억 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미국인 관광객들이 쿠바 현지에서 미국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정보화 후진국인 쿠바에 미국 통신업체들이 진출하면 관련 투자도 활발히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교육과 문화 교류에 대한 기대도 높았다. 블라디미르 도밍게스 아바나대 외국어학과 교수는 16일 “쿠바 대학생들이 미국의 좋은 대학에 가서 많은 경험을 하고 훌륭한 미국 교수들이 아바나대에 와서 가르치며 쿠바를 이해하고 갈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바나=신석호특파원 kyle@donga.com
#오바마#쿠바#국교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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