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베이스볼] ‘빅리거’ 강정호, 그의 힘은 시련에 있었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5년 1월 20일 06시 40분


강정호. 스포츠동아DB
강정호. 스포츠동아DB
지석훈·차화준에 가렸던 데뷔 시절
얼굴뼈 부상·중심타자 변신 슬럼프…
잇단 시련 속 매해 겨울 묵묵히 훈련
ML직행 한국프로야구 야수 1호 결실

한국프로야구 출신 야수로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된 강정호(피치버그·28). 그는 이제 메이저리그 피츠버그에서 조디 머서, 조시 해리슨, 닐 워커 등과 내야 주전경쟁을 앞두고 있다. 지금은 메이저리거로 비상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다. 시련과 경쟁은 강정호를 키운 자양분이었다. 강정호의 그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

● 지석훈 차화준 강정호…신인 드래프트서 유격수에 집착했던 현대

넥센의 전신인 현대는 2003년 신인 드래프트부터 1차 지명을 하지 못했다. 서울 연고지 이전 보상금을 내지 못해 수원구장에 주저앉았고 서울 출신 신인도 1차 지명에서 뽑지 못했다. 그해 현대는 모기업 현대그룹이 대북사업 실패 등으로 흔들리며 2003년 시즌 후 FA(프리에이전트)가 된 심정수와 박진만을 잡지 못하는 아픔까지 겹쳤다.

심정수의 빈 자리는 거포 외국인타자가 대신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상급 수비 실력을 갖춘 유격수는 답을 찾기 어려웠다. 현대는 과감히 2003∼2006년까지 4년 동안 3년이나 2차 지명 1라운드에서 유격수를 뽑았다. 구단이 그해 선택할 수 있는 첫 번째 신인을 4년 동안 3번이나 유격수로 택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 프로야구를 지배했던 현대는 그만큼 수비의 핵 유격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2003년 드래프트 첫 주자는 휘문고 출신 지석훈이었다. 계약금만 2억5000만원을 줬다. 당시 1차 지명 주인공들은 두산 노경은, SK 송은범, LG 박경수 등이다. 1차 지명을 포함해 전체 13번째로 뽑힌 지석훈은 고교 3학년 때 대통령배에서 홈런왕과 황금사자기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최고의 유망주였다.

2003년 시즌을 끝으로 박진만의 이적이 현실이 되자 현대는 2004년 열린 2005드래프트에서 다시 자신들의 첫 번째 카드를 경주고 출신 유격수 차화준을 지명하는데 썼다. 전체 2차 1라운드 전체 8순위로 뽑힌 차화준은 박병호, 최정, 오승환, 정근우 등과 입단 동기다.

● 유격수가 넘쳐나는 현대 팜에서 살아남은 강정호

2006년 신인 드래프트. 현대는 2차 1라운드에서 또 다시 전천후 내야수 광주일고 강정호를 뽑았다. 이미 지석훈과 차화준이라는 유망주가 팜에 있었지만 3라운드에서 경기고 유격수 황재균까지 뽑으며 포스트 박진만 찾기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강정호는 고교시절 당시 롯데가 류현진보다 앞서 지명한 나승현과 함께 광주일고를 이끌며 전국구 고교 스타로 주목받았다. 청소년대표로 활약했고 포수와 투수로도 가능성을 보이며 각 팀이 군침을 흘렸다. 그러나 고향 팀 KIA는 155km를 던지는 동성고 투수 한기주를 1차 지명에서 놓칠 수 없었다. 2차 1라운드는 강정호를 제외하고 모두 투수였다. 당시 지명 동기들이 류현진, 손영민, 차우찬 등이다.

큰 기대 속 현대에 입단했지만 역시 고교시절 스타였던 지석훈, 차화준의 벽은 높았다. 2006년 강정호는 데뷔 첫해 1군에서 단 10경기만 뛸 수 있었다. 2007년에는 스프링캠프에서 지석훈에게 토스 배팅 훈련을 돕다 배트에 맞아 얼굴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해 20경기 출장에 그쳤다.

● 기울어가는 팀, 마스크까지 썼던 ML직행 한국프로야구 야수 1호

2008년 시즌을 앞두고 현대는 결국 팀을 포기했다. 고교시절 장밋빛 미래가 가득했던 강정호는 20대 초반 나이에 동료, 선후배들과 큰 시련을 겪었다. 그 해 이광환 감독은 강정호를 포수로 기용하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찾기도 했다. 큰 위안은 다양한 포지션에서 116경기에 출전, 8개의 홈런을 날리며 장타력을 인정받은 점이었다.

2009년 다시 팀 사령탑에 오른 김시진 감독은 강정호를 주전 유격수로 낙점했다. 친한 동기생이자 라이벌이었던 황재균을 3루로 옮겨 교통정리를 했다. 시즌 초반 1할 타율에 허덕였고 8월 15일에야 첫 도루를 신고하는 등 풀타임 주전 유격수로 출발은 녹록치 않았다. 그러나 그 해 23개의 홈런을 치며 메이저리그 진출의 초석을 놨다. 당시 사령탑을 맡았던 김시진 전 감독은 “나는 팀을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강정호는 10년 동안 팀의 유격수 자리를 책임질 수 있는 선수다. 뿌듯하다”고 말했다. 강정호는 “매일 경기에 나가는 것 자체가 행복할 뿐이다”고 말했다. 2010년과 2011년 중심타자로 변신한 후 극심한 타격 슬럼프에 빠질 때가 많았지만 매해 겨울 장타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근력운동을 포기하지 않으며 거포 유격수를 완성했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 탈락 위기(2013년 3월 대만전)에서도 “큰 점수차로 이겨야 하니까 꼭 홈런을 치겠다”고 다짐했고 결국 그 약속을 지켜낸 담대함 그리고 신인 때부터 큰 시련과 경쟁을 이긴 경험은 강정호가 갖고 있는 큰 힘이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트위터 @rushl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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