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부형권]뉴욕 캅스 vs 서울 경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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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뉴욕 특파원
부형권 뉴욕 특파원
거의 20년 전 사회부 경찰서 출입기자 시절. 초짜 20대 기자는 늙수그레한 경찰 아저씨들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매일 밤과 새벽 형사당직기록부를 뒤적이며 “형님, 별일 없어요?”라고 묻는 것이 안부 인사였다. 경찰도 기자도 경찰서가 집이었다. ‘경찰의 꽃’이라는 일선 서장은 딱딱한 야전침대에서, 경쟁률 100 대 1의 ‘언론고시’를 통과한 청년들은 눅눅한 기자실에서 쪽잠을 잤다. ‘우린 서울의 까만 밤을 하얗게 지키는 사람들’이란 묘한 동병상련이 형성됐다. 새벽녘에야 야식으로 나눠 먹던 치킨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

한국과 미국, 서울과 뉴욕은 다르다. 서울 경찰과 뉴욕 캅스(cops)도 같을 수 없다. 요즘 기자는 미국 공권력의 상징 중 하나인 뉴욕 시 경찰청(NYPD)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탐구 중이다.

NYPD는 우선 무섭고 두렵다. 거리에서 가치담배를 팔던 흑인이 단속하던 백인 경찰에게 목을 졸려 숨졌지만 NYPD는 결국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뉴욕 맨해튼은 한동안 그 흑인의 마지막 절규인 “난 숨을 쉴 수가 없어요”를 외치는 시위대로 넘쳐났다. 이래저래 만난 일선 NYPD들에게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들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러 대답 중 “‘6명보다 12명에게 의지하는 게 낫다’는 경찰 내부 격언이 있다”는 한 경관의 귀띔에 꽂혔다. 6명은 시신이 담긴 관(棺)을 드는 사람 수, 12명은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대배심단 수. 망설이다가 범죄자의 총에 맞는 것보다 무조건 먼저 제압해 법의 판단을 받는 게 낫다는 인식이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최근 “과잉 진압한 경찰에 대한 조사나 수사가 결국 ‘제 식구 감싸기’로 끝나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NYPD가 무섭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용기와 희생정신에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2001년 9·11테러 당시 소방대원 343명과 함께 항만청 경찰 37명, NYPD 23명도 숨졌다. 라파엘 피녜이로 전 NYPD 제1차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NYPD는 건물이 무너지는 걸 알면서도 (구조를 위해) 위로 위로 올라갔다. 우린 그렇게 훈련돼 있다”고 말했다. 수년 전 한 NYPD 경찰이 총격 신고 무전을 받고도 의도적으로 늦게 현장에 도착한 일이 있었다. ‘가장 먼저 사건 현장에 도착하는 것’을 명예로 여기는 NYPD 분위기에 역행한 행동이었다. 다음 날 동료 경찰들은 그의 사물함과 옷장을 다 엎어버렸고 ‘겁쟁이’라고 크게 낙서를 했다. NYPD들은 “‘비굴하게 살아남기’보다 ‘명예롭게 희생하기’가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이렇게 죽으면(순직하면) 내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걱정이 들지 않나.”(기자)

“그런 걱정을 하는 NYPD는 없다. 국가가 유가족의 여생을 더욱 확실히 끝까지 책임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피녜이로 전 제1차장)

지난달 순찰차에 앉아 있던 NYPD 2명이 대낮에 20대 흑인의 무차별 총격에 숨졌다. 윌리엄 브래턴 NYPD 청장은 그 장례식에서 NYPD를 이렇게 정의했다. “(NYPD는) 다른 직업과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을 여러분에게 줍니다. 하지만 어느 날 이렇게 여러분에게 ‘모든 걸’ 다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20년 전 함께 치킨을 나눠 먹으며 밤을 지새우던 서울 캅스 ‘형님’들은 경찰의 삶을 어떻게 정의하며 살았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하다.

부형권 뉴욕 특파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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