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응준]대한민국 진보 좌파를 위한 고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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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소설가
이응준 소설가
정세 분석은 냉혹한 병법이자 고도의 현상학이다. 거기에 제 명랑한 고집을 계속 들이대 봤자 결과는 몽롱한 짜증과 명백한 좌절뿐이다. 패배도 어이없이 자주 하면 습관이 되고 이것이 전통으로까지 발전한 자들을 우리는 ‘노예’라고 부른다.

작년 여름 광화문광장에서는 희대의 블랙코미디가 펼쳐졌다. 인터넷 속에서 세상의 대낮으로 출현한 ‘일베’라는 우파 청년들이 단식투쟁 중인 세월호 유가족과 그 동조자들 앞에서 피자와 햄버거와 자장면을 먹어 댔고 이에 대한 반격으로 좌파들은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라 개라면서 일베들에게 개 사료를 뿌려 댔다. 얼마 뒤 서북청년단이 재건됐고 신은미라는 한 기이한 친북 재미교포 여인에게 오모 군이라는 고교생 일베는 손수 제조한 폭탄으로 테러를 가했다. 이 이상의 사례들을 더 열거할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은 이미 내면적으로는 내전 상태다. 미군정 방첩대(CIC) 공식 통계로 1947년 8월 한 달간 남한 내 좌우 대립 테러는 505건, 이로 인한 사망은 90명, 부상은 1100명이었다. 통일 대한민국은 제2의 해방정국 정도가 아니라 오만 가지 이념적 이해 집단들이 뒤엉킨 증오와 폭력의 무간지옥이 될 것이다. 나 같은 컬트 작가의 검은 예언이 적중하는 국가는 희망이 없기에, 나는 꿈에라도 장차 유명해지기를 바라지 않겠다. 다만 내 친구인 한 좌파 이론가가 저 일베를 두고 남한 극우의 변태적 변종이라는 식으로 간단히 진단해 버리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으니 이는 어떤 충격적인 영상이 우리 사회의 한복판으로 내던져졌을 때 그 당사자일수록 그것을 더욱 과학적으로 분석해야 모든 이에게 밝은 미래가 있을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물론 그 당사자가 자신이 당사자인지도 모른다는 게 절망적이긴 하지만.

친구에게 묻는다. 일베의 친부모가 남한의 극우라는 그 비겁에 가까운 오만은 대체 어디서 배운 무식인가? 병든 이념의 섹스 끝에 저 일베를 잉태해 배 아파 낳은 아비 어미가 다름 아닌 이 나라의 수구 꼴통이라는 게 진정 온당한 소견이란 말인가? 천만에. 일베와 같은 어두운 군중 현상들은 특정 세력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반동으로 태어나 창궐하는 법이어서, 이 노릇을 깨달은 소위 진보 좌파는 졸지에 SF 공포영화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된다. 평소 자기들이 버러지(일베충)라고 경멸해 마지않던 그 에일리언들이 사실은 제 배 속을 뚫고 나와 자라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니까 말이다. 유전자 감식 같은 헛소린 제발 집어치우길 바란다. 아무리 바보라도 제 자식은 알아봐야지. 일베는 대한민국 좌파의 타락과 무능과 위선과 ‘자뻑’이 우파의 집 앞에 내다버린 사생아들이다.

좋다. 일베가 벌레라고 치자. 그래서 뭐? 인간이라도 한 표가 없는 인간은 안 무섭지. 저들은 각자 다 한 표씩 가지고 있는 벌레들이다.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젊은이들은 무조건 좌파 쪽을 찍고 늙은이들은 무조건 우파 쪽으로 찍으니까, 세월이 흘러 현재의 노인들이 다 죽어 버리면 대한민국은 자연히 좌파의 나라가 되리라는 몽상도 가능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청년들의 투표율이 높아도 좌파는 선거에서 늘 지고 있다. 모르겠는가? 일베는 좌파의 혐오 대상이기 이전에 원래는 좌파의 자리에 함께 서 있어야 했던 애들이다. 그런데 왜 우리의 좌파는 저 수많은 젊은이를 적들에게 뺏기는 것도 모자라 괴물로 만들었을까? 쟤들은 자식을 잃고 단식하는 사람들 앞에서 햄버거와 피자와 자장면을 먹는 벌레들이 아니라 자식을 잃고 단식하는 사람들 앞에서 햄버거와 피자와 자장면을 먹는 벌레 같은 한 표들인 것이다. 좌와 우, 어느 쪽의 파이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이냐?

보수가 부패로 망한다고? 보수는 적어도 승리를 위해서라면 적의 충고조차 쥐가 밤말을 듣듯 한다. 이제 운동권의 도덕이라는 것은 이렇다. 제 사욕을 위해 친구를 사주해 친구를 살해한다. 전두환보다 나을 게 뭐란 말인가? 이러한 질문 안에 갇혀 있는 일베의 친부모들은 친구의 충언조차 절대 듣지 않는 강철 귀를 가지고 있다. “행하여 얻음이 없으면, 모든 것에 대한 나 자신을 반성하라. 내가 올바를진대 천하는 모두 나에게 돌아온다.” 맹자의 한 대목이다. 어차피 대한민국의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다 가짜지만, 날라리에 불과한 나는 이 나라의 진보 좌파에게 묻고 싶다. 정녕 노예가 되고 싶은 것인가?

이응준 소설가
#진보#좌파#일베#세월호#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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