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어전공자가 중국어 가르치고… 무너진 ‘제2외국어 교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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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제2외국어 영역에서는 처음 도입된 베트남어에 가장 많은 수험생이 몰리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고교 교사들은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등 기존의 제2외국어들은 정부의 무관심과 학생들의기피현상 때문에 고사 직전”이라고 비판했다. 동아일보DB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제2외국어 영역에서는 처음 도입된 베트남어에 가장 많은 수험생이 몰리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고교 교사들은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등 기존의 제2외국어들은 정부의 무관심과 학생들의기피현상 때문에 고사 직전”이라고 비판했다. 동아일보DB
독일어를 전공한 교사 한모 씨는 서울 시내 고등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친다. 원래 독일어 교사였지만 독일어 선택 학생이 줄어 학교가 독일어 반을 없앴다. 그 대신에 한 씨에게 중국어 교사 자격증을 따도록 한 뒤 중국어 반에 투입했다. 10년 이상 가르쳐 온 독일어 대신에 급하게 배운 중국어를 가르치자니 교사 자신도 자괴감이 들고 학생들도 의아해했다.

이런 상황은 다른 제2외국어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수업 시간이 줄어들면서 여러 학교를 돌아다니며 제2외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도 늘고 있다. 한 씨는 “다른 독일어 선생님 중에는 3, 4개 학교를 돌며 수업하는 경우도 있다”며 “인근 학교들이 연합해 한 명에게 돌아다니며 독일어를 가르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제2외국어 수난시대

제2외국어는 2009년 교육과정 개편 때부터 입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일반고 교육과정에서 영어와 함께 외국어 영역으로 분류돼 비중이 컸지만 이때부터 생활교양 영역으로 옮겨지며 비중이 줄었다. 최근 대부분의 대학도 입시에서 제2외국어 성적을 요구하지 않는 추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일부 교사는 아예 자포자기하기 시작했다. 전공인 중국어 대신에 ‘창의적 재량활동’을 가르치고 있는 한 교사는 “어차피 고교 교사는 정년 보장이 되고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도 정책은 바뀌지 않는다”며 자조했다.

학생들은 제2외국어 수업을 외면한 지 오래다.

고등학교 2학년 김모 군은 “중국어 수업 시간에 중국어를 공부하는 아이들은 드물다”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중국어를 선택하는 친구가 없어 선생님도 자습을 시키고 친구들은 다른 과목을 공부한다”고 말했다. 충북 청주의 한 고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사 신모 씨는 “교사들이 모금운동을 해서 신문에 광고하고 교육부 공무원 쫓아다니면서 대책 좀 세워 달라고 호소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 씨는 “수업 시간에 대놓고 다른 과목 책을 펴놓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봐도 야단치거나 책을 덮으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교장과 학부모들이 ‘수능 공부가 우선이다’며 이런 상황을 묵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교사들의 울분과 석연찮은 베트남어 돌풍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 전통적인 제2외국어 교육이 무너지는 가운데 학교에서 거의 가르치지도 않는 베트남어, 아랍어에 학생들이 몰리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지난해 수능 제2외국어 과목 응시자 중 가장 많은 학생이 선택한 것은 베트남어(2만2865명)였고 그 다음은 아랍어(9969명)였다. 중국어(5782명)는 베트남어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일반고 학생들이 베트남어, 아랍어를 수능에서 선택하는 것은 원어민 수준으로 제2외국어를 배우는 외국어고 학생들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다. 수능에서 낮은 등급을 받을 게 뻔하니 외고 학생들이 잘 응시하지 않는 베트남어, 아랍어에 몰린 것이다. 일반고 학생들은 학원이나 EBS 교재로 베트남어나 아랍어를 독학해 수능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히 학교의 제2외국어 수업 시간에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지난해 수능 직후 조용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대학수학능력시험본부장은 이런 상황을 모른 채 “베트남어에 학생들이 몰린 것은 베트남과의 교류확대 때문에 관심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가 고교생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됐다.

이런 현상이 장기화되면 학생들 사이에서 ‘제2외국어 실력 양극화’가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부모가 고소득층이거나 학력이 높은 가정은 제2외국어의 필요성을 잘 알기 때문에 사교육을 통해서라도 자녀에게 외국어를 가르칠 것. 반대로 공교육에 의존도가 높은 일반 서민이나 저소득층 가정 학생들은 ‘수능 응시용’ 외에는 제2외국어 실력이 갈수록 낮아질 것이란 지적이다. 한 프랑스어 교사는 “올해 교육부가 내놓은 교육과정 개편 안에도 제2외국어 수업을 살릴 대책은 빠져 있었다”며 “지난해 정부는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 순방 때 프랑스어로 연설했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작 고교 교실에서 프랑스어 수업은 사라지기 직전”이라고 꼬집었다.

이은택 nabi@donga.com·임현석 기자
#독어#중국어#제2외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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