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이중섭이 ‘어린 덕수’를 만났을 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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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사회는 오랜 전쟁으로 기진맥진하였고 부산은 날이 갈수록 사람들로 그득하였다. 뒤늦은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밀려오다 보면 바닷속으로 빠져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사람들이 넘치고 또 넘쳤다. … 주머니 사정이 비슷하다 보니 싸울 일도 남을 헐뜯을 일도 없었는데, 늘 전장의 움직임을 살피며 불안과 초조를 느끼고 있었다.”

화가 이중섭(1916∼1956)과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한 백영수 화백(93)은 회상록 ‘성냥갑 속의 메시지’에서 피란 시절을 이렇게 기억했다. 창작 열정은 뜨거웠으나 글 쓸 지면이나 캔버스와 물감도 없던 예술가들. 남포동 금강다방에 일없이 모여 있다 점심이면 허기를 채우러 국제시장을 찾았다. ‘앙꼬’ 없는 밀가루 찐빵만 먹을 수 있어도 행복했던 날들, 백 화백에 따르면 다들 고달팠지만 그중 범일동 판잣집에 살던 중섭의 사정이 몹시 딱했다.

중섭은 불도 땔 수 없는 냉방에 홀로 살며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은 피란 시절 일본인 송환선으로 대한해협을 건너갔고, 다방에서 다 피운 담뱃갑 속 은박지에 그림 그리는 게 유일한 낙인 시절이었다. 요즘 관객의 입소문을 타고 있는 ‘이중섭의 사랑, 가족’전은 가족 사랑을 노래한 은지화를 중심으로 미공개 편지그림 등을 모은 전시다. 가난과 고독을 견디다 못해 불혹의 나이에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 화가. 한데 전시장에 나온 그림들은 눈물과 절망 대신 활기차고 건강한 희망을 들려준다. 처절한 고통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그 여유와 긍정의 미학은 그래서 울림이 더 묵직하다.

1950년 12월 원산에서 어머니를 남겨두고 식솔들과 월남선을 탄 중섭은 제주도에서 보낸 몇 개월을 빼고 1953년 말까지 부산에 머물렀다. 그제 올해의 첫 ‘1000만 영화’로 등극한 ‘국제시장’의 시대배경과 겹친다. 영화 주인공 덕수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아마도 중섭은 금강다방과 국제시장을 오가며 숱한 ‘어린 덕수’와 마주쳤을 터다. 윤제균 감독이 그 인연을 알았다면 영화에 뜬금없이 등장한 정주영, 앙드레 김의 모습과 더불어 중섭과 덕수의 만남도 담겼을 법하다.

영화의 영어 제목(‘Ode to My Father’) 그대로 ‘국제시장’은 풍요로운 이 땅의 밑거름이 돼준 아버지들의 구겨진 삶에 바친 뒤늦은 헌사다. 하고 싶은 것 많았으나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산 적 없던 덕수의 여정은 불우한 시대를 헤쳐 온 세대의 집단 기억과 포개진다. 개봉 28일 만에 ‘천만 영화 클럽’에 들게 된 것도 무관심과 몰이해 속에 잊혀진 그때 그 시절을 주목해야 한다는 공감의 확산을 의미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1910년대생 위대한 화가. 6·25전쟁, 파독 광부, 월남전, 이산가족 찾기 등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하는 1940년대생 평범한 소시민. 지극히 가족을 사랑했던 두 가장은 끝나지 않은 과거와 교감하는 길을 보여주고, 거대한 고난의 벽 앞에 당당했던 한국인의 정신적 DNA를 재발견하게끔 한다. 미술과 영화를 통해 앞선 세대의 정서와 삶을 오늘로 불러와 우리 민족의 정서적 연대감을 일깨워주는 것, 사회적 영매로서 예술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중섭과 덕수, 둘의 궤적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향해 화두를 던진다. 고난을 과장하거나 생색내지 않고 한국 사회를 묵묵히 지탱해온 사람들에 대한 합당한 경의를 오늘의 우리는 보내고 있는가. 지금껏 고마운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 오진 않았는가. 광복 70년을 기리는 첫걸음, 바로 그 대답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이중섭#어린 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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