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됐지만 정겨운 골목길 풍경 허름하지만 푸근한 동네 호프집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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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식도락]⑪살롱 아터테인 오정일 전 맥줏집 황씨네 돈가스

오정일 씨가 털 한 가닥만 달린 붓으로 그린 유채화 ‘눈 위의 고양이들’(위 사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골목의 정경에서 소재를 얻었다. 아래 사진은 전시실 근처 맥줏집 ‘황씨네’의 돈가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오정일 씨가 털 한 가닥만 달린 붓으로 그린 유채화 ‘눈 위의 고양이들’(위 사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골목의 정경에서 소재를 얻었다. 아래 사진은 전시실 근처 맥줏집 ‘황씨네’의 돈가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편견일 수 있지만, 갤러리가 자리 잡을 입지는 아니다. 버스에서 내려 들어선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연희동) 골목은 최근 먹고 즐기기 좋은 곳으로 주목받는 ‘그 연희동’에서 도보로 20여 분 북쪽에 떨어진 동네다. 홍제천 위 고가도로 그늘이 종일 영향력을 행사한다. 재개발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도시 전반 변화의 흐름으로부터 수십 걸음 뒤처진 지역. 30일까지 오정일 작가(43)의 초대전 ‘한 가닥의 선: 생명에서 사물로’가 열리는 살롱 아터테인은 그 골목 안 낡은 상가 건물에 철공소, 간판집, 합기도장과 이웃해 있다.

전시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조관용 씨(52)는 마포구 아현동에서 40년 넘게 살았다. 9년 전 재개발로 뭉텅뭉텅 허물어진 동네 집과 건물을 그곳 출신 작가와 함께 돌아보다가 그가 눈물짓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얼마 뒤 오 작가에게 아직 빛바랜 채 그대로인 연희동 골목의 풍광과 사물을 그려 달라 청했다.

오 작가는 홍익대 서양화과 재학 때인 1990년대 말부터 머리카락 그리기에 매달렸다. 그는 “페티시(집착)가 맞다. 부분과 전체가 실질적으로 공존하는 사물이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주제로 삼은 소재와 표현 방법 사이의 일체감을 얻기 위해 한 가닥의 털만 달린 붓을 직접 제작해 썼다. 새로 작업한 풍경화와 함께 내놓은 전작은 갖가지 사물을 머리카락 그리듯 한 올 한 올 뽑아낸 형상들이다.

싱가포르에서 넋 놓고 구경한 분수 물줄기, 중국 베이징 역사박물관에서 마주친 인물 두상에 붙은 턱수염…. 오 작가는 “가늘게 그은 가닥의 흔적이 늘어날수록 캔버스 위의 선들이 서로 호흡하며 영향을 주고받음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희동 골목에서 눈 내린 다음 날 아침 만난 길고양이 두 마리, 담장 위 나무, 플라스틱 주차표지, 허물어진 굴다리에서 분리돼 버려진 이맛돌을 찾아 그렸다. 에칭(구리판에 방식제를 입힌 뒤 바늘로 그린 선을 산·酸으로 부식시켜 제작하는 판화 기법)을 연상시키는 선 뭉치가 은근한 온기를 전한다.

날이 저물자 오 작가는 갤러리 문을 닫더니 홍제천 앞 맥줏집 ‘황씨네’(02-3143-0442)로 앞장섰다. 생맥주가 시원하지만 거품이 거칠고, 안주로 나온 돈가스가 푸짐하지만 바삭바삭 맛있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굳이 멀끔한 ‘그 연희동’으로 이동해 해산물 파스타를 연결하기도 어색한 일이다. 가게 사장은 어제 누가 잔뜩 주고 갔다며 귤을 한 무더기 내놓았다. 동묘 앞 시장에서 주말마다 하나둘 사다 모았다는 잡동사니가 온 벽에 빼곡하다.

언제부터 술맛을 따졌더라. 20대 후반 등교하듯 드나들던 신촌 단골집 맥주는 거품이 어땠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포크와 접시는 지저분했고 양배추는 늘 메말랐고 감자튀김은 퍼석했다. 떠오르는 건 함께 있던 사람과 음악과 웃음뿐이다. 퍽퍽한 돈가스를 씹다가 아주 잠깐, 재개발로 사라진 신촌 그 골목에 다녀왔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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