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로버트 파우저]한국 고등학교 교육 과정의 ‘기초’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작년 가을에 미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28년 만이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바빴다. 늦가을 즈음 고등학교 동창 몇 명을 만나 수십 년 흐른 서로의 세월을 이야기했다. 밤이 깊어가도록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친구들은 그 시절 그대로인 듯했다.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변화의 시간을 보냈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980년에는 미국과 냉전을 벌이는 소련이라는 국가가 존재했고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9위였다. 일본은 미국을 초월하려고 하는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는 나라였다. 비행기 안에는 아직 흡연석이 있었다. ‘기후 변화’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고 ‘글로벌’이란 말도 낯설었다.

누가 뭐래도 30여 년의 세월에서 가장 큰 변화는 정보기술(IT)의 발전이다. 고향을 떠난 해인 1986년은 애플이 내놓은 최초의 매킨토시 시리즈, 매킨토시 128K가 나온 무렵이다. 대학에서도 극히 일부 학교만 인터넷을 사용했다. 모교인 미시간대는 그중 한 곳이었다. 학교를 다닐 때 ‘e메일’이란 말을 처음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동창들과 만난 뒤 호기심이 생겨 졸업한 고교의 웹사이트를 방문했다. 35년간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어와 수학 중심인 미시간 주 교육과정의 기본 틀은 예전과 비슷했다. 교육은 원래 천천히 바꾸기 때문에 놀랍지 않았다. 그래도 교육과정을 자세히 살피니 흥미로운 변화 몇 가지가 눈에 띄었다.

옛날에 고등학교 학제는 3년간인 10학년에서 12학년까지였지만 지금은 9학년부터 시작해 4년이 됐다. 과거 11학년에 있었던 ‘미국사’는 10학년으로 옮겨지고 11학년에는 시민의식을 높이는 ‘미국 정부’ 및 ‘경제학’을 필수로 지정하고 있었다. 외국어를 보니 러시아어가 없어졌고 중국어가 추가됐다. 미시간 주 교육과정 개정에 따라 2016학년도 졸업생부터 외국어가 필수가 됐다. 그리고 웹 디자인을 포함해 컴퓨터와 관련된 선택 과목도 추가돼 있었다.

호기심이 이번엔 한국으로 옮아갔다. 한국의 고등 교육과정을 검색해 보니 국어와 수학 비중이 큰 것은 비슷했다. 자율 선택권은 미국 교육과정이 훨씬 폭넓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미국은 사회 과목에서만큼은 자율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선택 지정하고 있는 사회 관련 과목을 미국은 필수로 가르치고 있다. 미국 고교가 미국의 역사를 포함해 미국의 정부 시스템 그리고 경제학까지 필수로 가르치는 이유가 뭘까.

미국 공교육의 출발은 ‘미국인으로서의 민주시민 만들기’에 있다. 영국에서 독립하고 나서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만들 필요가 있었고 이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이면서 새로 온 사람의 ‘미국화’도 중요했다. 독립혁명을 한 만큼 미국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주의적 측면이 강하다. 시민의식이 높으면 책임 있는 투표를 행사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미국의 이상주의가 ‘미국 정부’ 관련 과목을 필수로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경제학을 필수로 하는 이유는 어떻게 봐야 할까. 20세기에 미국 교육은 점차 취업을 포함해 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준비하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20세기 말부터 심해진 ‘글로벌 경쟁’을 맞아 교육을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화제가 됐고 지금도 화제다. 그 과정에서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경제 지식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외국어를 필수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보면 미국 교육에는 뿌리 깊은 이상주의 및 시대가 요구하는 실용주의가 동시에 작용한다.

한국의 역사는 미국과 많이 다르지만 교육의 지향점을 놓고 보면 유사한 점이 많다. 일제강점기의 악몽에서 해방이 되면서 ‘민족 정체성’ 회복이라는 이상주의가 대두됐고 1960년대부터 공업화와 함께 시동 건 경제 성장은 실용주의적 교육도 요구했다.

그런데 한국이 그 와중에 이상주의 및 실용주의의 균형을 잃고 있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마치 학생을 위한 고객 서비스를 하는 것처럼 학생들이 쉽게 공부하도록 교육과정을 마련한다. 그러면서 영어를 ‘기초’ 과목에 두고 지나치게 집중 투자한다.

앞으로는 엄청난 변화에 대비할 수 있도록 이상주의와 실용주의가 균형 잡힌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고등 교육과정의 ‘기초’는 영어만이 아니라, 빠르고 복잡한 사회에서 희망 및 생활력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고등학교#경제학#민주시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