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성 비닐로 감싼 바비큐장 “불난 적도 없는데 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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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숱한 참사에도 안전불감증 여전

지난해 잇단 대형 사고로 대한민국은 아직도 집단적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는 사고 때마다 갖가지 대책을 내놓으며 재발을 막겠다고 공언했다. 세월호 참사 여파로 국민안전처가 생겨났고,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후에는 환풍구 높이를 2m 이상으로 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 나왔다. 그러나 동아일보 취재팀이 여객선, 환풍구, 펜션 바비큐장(전남 담양 펜션 화재) 등 지난해 대형 사고가 발생했던 시설들을 점검한 결과 구호와 정책만으로는 근본적인 변화가 힘들어 보였다.

안전교육은 헛돌고 시민 안전의식은 여전히 제자리다. 숱한 참사를 목격했고, 심지어 스스로 상당한 위험에 노출돼 있는데도 여전히 ‘설마’ 하는 국민이 태반이다. 정재희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시민의식 변화와 사고 위험 현장의 세밀한 개선이 필요하다”며 “거시적 정책 변화만으로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 세월호 참사 보고도 안전 무시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사고 후 선박 안전점검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온갖 대책이 쏟아졌다. 취재팀은 8개월이 지난 지난해 12월 23일 전남 완도와 제주도를 오가는 23년 된 한 여객선(6000t)에 직접 탑승해 안전실태를 점검해 봤다. 하지만 선박 관계자와 승객 안전의식은 세월호 참사 당시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세월호 침몰이 대형 참사로 이어진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사고 발생 후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만 나왔을 뿐 비상 탈출 매뉴얼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 이 여객선 선실에서 나오는 안전 영상을 보는 승객은 거의 없었다. 승객 이모 씨(45)는 “매일 같은 영상인 데다 꼭 보라는 법도 없다”며 잠을 청했다. 4시간의 항해 내내 승무원이 구명조끼 착용법을 알려주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세월호 사고 당시 선체가 균형을 잃은 원인으로 지목된 화물 고정 작업(고박)의 문제점도 그대로였다. 객실 아래 화물칸에 적재된 화물차 58대의 아랫부분은 쇠사슬로 총 8곳을 고정했지만 위쪽은 고정되지 않았다. 차량 위쪽이 고정되지 않으면 배가 한쪽으로 쏠릴 때 아래쪽 고박이 끊기거나 풀려 배가 기울어질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화물차 위쪽을 고정할 쇠사슬 장비와 규정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임긍수 목포해양대 교수는 “대형 참사 후에도 선박 안전이 크게 개선된 부분이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 16명 죽었지만 올라가도 괜찮은 환풍구

지난해 10월 관람객 16명이 숨진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환풍구 사고 현장을 2개월여 만에 다시 찾았다. 관리사무소는 사고 환풍구 주위에 철제 펜스를 둘러 접근을 차단했다. 하지만 사고 현장 반경 200m 이내의 환풍구 2곳에는 출입을 막는 ‘경고 문구’조차 없었다. 1.3∼1.5m 높이의 이들 환풍구는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전문가들은 “사고 환풍구는 공연이라는 상황 때문에 ‘관람 장소’로 전용되면서 사고가 난 것”이라며 “환풍구 높이에 관계없이 접근을 차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하철 분당선 정자역과 서현역 인근 환풍구에서도 위험이 감지됐다. 정자역 앞 환풍구는 인도와 약 10cm 높이 차만 있을 뿐 사실상 인도나 다름없었다. 기자가 환풍구 위에 올라보니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덮개에 연결된 나사는 반쯤 풀린 채 튀어나와 있었다. 서현역 인근 환풍구도 시민 통행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김모 씨(20)는 “판교 사고는 여러 명이 환풍구 위에 함께 올라가서 (덮개가) 하중을 못 견딘 것이다. 나 한 명쯤 올라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허술한 화물차 고정… 화재경보기는 어디에… 지난해 12월 전남 완도∼제주를 오가는 6000t급 
여객선의 화물칸 내부(왼쪽 사진). 화물차량 아래쪽은 쇠사슬로 고정돼 있지만 위쪽은 특별한 장치가 보이지 않는다. 경기 가평군의 한
 펜션 바비큐장은 전체 벽면이 화재에 취약한 비닐로 돼 있다. 제주=이철호 irontiger@donga.com / 가평=강홍구 기자
허술한 화물차 고정… 화재경보기는 어디에… 지난해 12월 전남 완도∼제주를 오가는 6000t급 여객선의 화물칸 내부(왼쪽 사진). 화물차량 아래쪽은 쇠사슬로 고정돼 있지만 위쪽은 특별한 장치가 보이지 않는다. 경기 가평군의 한 펜션 바비큐장은 전체 벽면이 화재에 취약한 비닐로 돼 있다. 제주=이철호 irontiger@donga.com / 가평=강홍구 기자
○ “아직까진 불 안 났어요!”

경기 가평군 A 펜션의 바비큐장은 천장과 외벽 모두 비닐로 덮여 있었다. 지난해 11월 사상자 10명(사망 4명, 부상 6명)을 낸 전남 담양 펜션 화재 현장은 지붕이 억새로 돼 있었다. 억새보다 불이 더 잘 붙는 비닐로 덮여 있었지만 바로 아래에는 고기 굽는 화로가 놓여 있었다. 불티가 비닐로 튀면 ‘제2의 담양 화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A 펜션 주인은 “싼 비닐을 사용하지만 아직까지 화재가 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화재가 난 담양 펜션도 참사 이전까지는 불 한 번 나지 않았다.

취재팀이 지난해 12월 23일 펜션 밀집 지역인 경기 가평군과 강원 춘천시의 펜션 바비큐장 10곳을 둘러본 결과 모든 바비큐장이 비닐로 덮여 있었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비닐은 불에 잘 타는 소재인 데다 유독가스 발생의 주원인이다. 불길 확산 속도도 빨라 비상 상황 발생 시 탈출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화재경보기와 탈출구 안내 비상등이 설치된 펜션 바비큐장 역시 단 한 곳도 없었다. 펜션 3곳은 소화기도 아예 없었고, 나머지 7곳도 소화기의 위치 안내를 찾을 수 없었다. 운동기구 사이 등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소화기를 둬 화재 발생 시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올해도 “예고된 참사” “반복된 지적에도 고쳐지지 않는 안전불감증” 이런 제목의 언론 보도가 반복될 것 같아 취재팀은 안타깝고 두렵기만 했다.

성남=정윤철 trigger@donga.com / 제주=이철호 / 가평=강홍구 기자
#안전불감증#세월호 참사#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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