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달팽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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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류근택의 ’아침’
한국화가 류근택의 ’아침’
달팽이
김제현(1939∼)

경운기가 투덜대며
지나가는 길섶

시속 6m의 속력으로
달팽이가 달리고 있다.

천만 년 전에 상륙하여
예까지 온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길을

산달팽이 한 마리
쉬임없이 가고 있다.

조금도 서두름 없이
전속으로 달리고 있다.


여느 날과 전혀 다를 바 없어도 새해 첫날의 느낌은 늘 새롭다. 새 마음으로 출근한 1일, 각 신문의 신년 사설을 챙겨 읽는데 공통의 화두가 뚜렷이 보인다. 광복 70년.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사회는 압축 성장의 신화를 썼으나 그 부산물로 남겨진 독한 후유증을 어떻게 치유할지가 당면 과제라는 진단이다. 치열한 경쟁에 부대끼는 사이 정착된 ‘빨리빨리’ 문화는 초고속 성장의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로 가는지 방향성을 잃은 세월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과 느림의 철학이 새로운 돌파구로 떠오른 듯하다.

이 땅의 전통적 문학양식을 꿋꿋하게 지켜온 시조시인 김제현의 ‘달팽이’는 오늘 우리가 되새겨야 할 깨달음을 전한다. 시속 6m의 전 속력으로 자기 목표를 향해 더디지만 쉼 없이 이동하는 산달팽이는 수단과 방법 안 가리고 가시적 성과를 쫓아 속도전에 집착하는 인간들에게 무언가를 생각하게 한다.

속도를 담보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 끝엔 뭐가 기다릴까. 신년 이브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베드로 성당에서, 새해 불꽃놀이는 잠시뿐이니 인생의 유한함을 성찰하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사라질 화려한 불꽃에 눈멀어 삶을 소진하는 이들을 향해 인생 행로의 끝을 숙고하고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살라고 강조한 것이다.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 낯선 신조어가 늘어나듯이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말들도 많다. 이 시조에 나온 산달팽이의 존재야 말할 것도 없고, 예전에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던 복덕방(福德房)도 그런 정감 어린 단어 중 하나다. 부동산 중개업소라는 무뚝뚝한 이름과 다르게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최근 한 계간지에 실린 원로학자의 복덕방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그가 오래전 집을 샀을 때 흥정을 맡은 복덕방 아저씨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파시는 분은 조금 손해 본다 하고 파세요.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시는 분은 조금 더 준다 하고 사세요. 그래야 집도 생기고 덕을 베푸는 것이 됩니다. 사는 사람이 돈 아끼려 들면 집 못 사지요. 파는 분도 돈 더 받으려고만 들면 집 못 팝니다. 그러니 돈 생각 말고 복을 받을지 덕을 베풀지를 생각하고 결정하세요. 자, 여기가 어딥니까? 복을 받고 덕을 베풀고 하라는 복덕방 아닙니까?”

속도와 금전적 이해라는 일방통행로를 질주하는 요즘 세태에는 생소하게 들리는 말이겠지만, 복만 받으려 들게 아니라 덕도 베푼다는 자세로 한 해를 살 수 있으면 세상은 훨씬 평화롭고 고요할 터다. 한국화가 류근택 씨가 살짝 커튼이 열린 공간으로 ‘아침’을 표현했듯이 2015년을 하루로 치면 방금 새 아침이 밝았다. 요란하지 않은 걸음으로 제 갈 길 찾아가는 양떼처럼 서두르지 않는 삶의 방식을 올해 좌표로 고민해봐야겠다. 또 금방 다가올 한 해의 끝에서 소중한 시간을 잘 살아내지 못했다는 후회가 없도록.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달팽이#프란치스코 교황#류근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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