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대호]서울은 로마가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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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과 관용의 온도… 나라 역사-현실따라 천차만별
엄존하는 北도발 위협 아래서 국민의 안보에 대한 걱정… 선진국과 같을 수는 없어
헌재의 ‘종북 통진당 해산’ 결정… 깊이 이해하고 변신하는 세력이 국민의 선택 받는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자신의 기대를 무참하게 배신하는 선거 결과를 접하고 눈과 귀를 의심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국민이 미친 것이 아닌지, 머리가 아니라 배로 투표한 것이 아닌지 원망한 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야속한 표심을 냉철히 분석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국민투표로 3권 혹은 4권 분립을 결정한 민주국가에서는 선거 결과와 헌법재판소 결정 및 대법원 판결은 그 위상이 거의 같다. 최종심이다. 물론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해 헌재를 없앨 수 있다. 총선을 통해 입법부를 재구성해 헌재나 대법원의 권능을 제한하고 재판관들을 갈아 치울 수 있다. 하지만 현행 헌법과 법률 아래서는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은 선거 결과와 같다. 물론 결정의 내용(논리), 시점, 재판관의 배경, 충원 방식과 헌재 자체의 존폐 문제도 시비할 수 있다.

그런데 1987년 헌법에 의해 탄생한 헌재가 지난 27년 동안 수많은 결정을 통해 그 나름대로 신뢰와 권위를 축적했고, 결정이 나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기각(통합진보당 존속)을 예상한 사람이 많았다면, 헌재가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도 곱씹어 보아야 한다. 사람은 갑자기 변하지 않고, 임기 3년 남짓 남은 정권이 이들에게 줄 당근도 채찍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결정은 정치적으로 보수에 좋을 것이 없다. 양대 진영의 연대 연합이 필수인 선거제도 아래서 상대의 약점에 집중 공격을 퍼붓는 것이 선거 전략의 기본인데 극심한 공포, 혐오의 공장인 정당이 ‘진보’ 간판을 달고 그 일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보수에 왜 나쁘겠는가? 요컨대 이번 결정도 기존의 많은 결정처럼 정권적, 진영적 고려는 별로 없는, 재판관 개개인의 소신과 양심에 따른 결정으로 볼 근거가 충분하다.

그래서 긴 심리 과정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자료와 정보를 접한 재판관들이 무엇을 주요하게 보았을지, 어디에 영향을 받았을지를 유추하게 된다. 2013년 5월 12일 서울의 한 수도원에서 열린 130여 명의 비밀 회합과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의 이력 및 당내 위상에 눈길이 간다. 이 전 의원의 지시에 130여 명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발언 내용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통진당의 후속 대응이다. 소속 의원의 부정, 비리가 적발되면 공당이라면 으레 하는 뼈를 깎는 반성과 도마뱀 꼬리 자르기(출당 등)도 하지 않았다. 당명·강령 변경, 재창당, 합당 등 환골탈태 쇼도 하지 않았다. 분단 체제 아래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끌고 간 통진당 지도부의 무모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북위 37.5도인 서울은 로마보다 4도나 적도에 가깝다. 하지만 시베리아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기단 때문에 훨씬 춥다. 태양의 각도나 일조량만 가지고 로마보다 따뜻해야 한다고 우기며 반팔로 돌아다니다가는 얼어 죽는다. 이처럼 나라마다 이념이나 관용과 관련된 기온과 기단도 다르다. 1952년 독일 헌재가 나치당의 후신인 사회주의제국당을 해산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과 함께 폐허로부터 느끼는 극심한 공포가 있었고, 당시 미국 프랑스 소련 등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확신컨대 사회주의제국당이 명백하고 현존하고 구체적인 위험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역사, 현실이 만들어 낸 극심한 공포가 위험을 크게 보고 정치적 관용 폭을 좁혀 버렸을 것이다. 전쟁, 분단, 핵 위협, 연평도 포격 등 한국 특유의 역사와 현실로 인해 종북 내지 유사시 내응 가능 세력에 대한 공포가 선진국과 같을 수 없다. 정치적 관용 폭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생긴 사고에 대한 과잉 공포 때문에 비용 대비 편익을 엄밀히 따지지 않고 안전 조치를 무차별적으로 강화하듯이, 일촉즉발의 정전 체제 아래서는 안보에 대한 과민 반응(?) 역시 자연스럽다. 충격적 선거 결과에 대해 그 표심을 깊이 이해하고 변신하는 세력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듯이 헌재 결정도 깊이 이해하고 적절히 변신하는 세력이 국민의 선택을 받는다. 국민도 재판관도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은 인간이다. 사실 역사와 제도는 공포를 빼놓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서울은 로마가 아니다. 한국은 유럽이 아니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로마#국민투표#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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