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신춘문예 2015]다른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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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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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당선작]<줄거리>전민석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스물여덟이 되던 해, 어깨부상이 낫지 않아 야구를 포기한 나는 뉴질랜드로 떠난다. 뉴질랜드에는 연인이 유학 중이므로 그녀의 집에서 머물 예정이다. 2년 전, 내가 재활훈련에 매진하던 시기에 그녀는 뉴질랜드로 떠나면서 내게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결혼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니 지금 하더라도 문제될 게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난색하며 말했다. 결혼을 할 수도,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 평생을 함께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게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재수가 늘 좋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녀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한발 물러섰다. 그녀는 뉴질랜드에 꼭 오라고 했다. 나는 가겠다고 했고, 그녀는 약속을 요구했다. 혼인신고보다는 나은 제안이었으므로 나는 뉴질랜드에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녀는 공항에 마중을 나와 있다. 그녀는 자신이 헨리라고 이름 붙인 중고차를 가져왔다. 그녀가 처음 뉴질랜드에 왔을 때, 이곳은 땅이 너무 넓어서 차가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버스로 갈 수 있는 곳까지가 그녀가 갈 수 있는 최종적인 국경선이 되는 것이다. 그때 그녀는 운 좋게도 헨리를 만났다. 우리는 헨리를 타고 와이테마타(Waitemata) 항의 레스토랑에 가서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전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곳에 와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나는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함께 다 해보자고 말한다. 그녀는 약속하라고 하고, 나는 약속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을 묻고 답한다. 그녀는 하스피탤러티(Hospitality)를 전공하고 있고, 두 달 뒤면 내셔널 컬리너리 페어(National Culinary Fare)에 참가할 것이다. 그녀는 내 건강을 걱정하면서 다시 야구를 할 거냐고 묻는다. 나는 늙어서 힘들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미안하다고 하고는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언제나 그녀가 눈물을 흘릴 때면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눈물을 멈춘 그녀는 내가 오지 않을 줄 알았다면서,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며 손을 달라고 한다. 나는 손을 내어주고, 레스토랑을 나올 때까지 그녀는 내 두 손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녀의 집은 시티에서 1시간 떨어진 시골에 있다. 차가 없으면 빠져나오기도 어려울 만큼 멀고 외진 곳이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드넓은 들판과 울타리, 양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풍경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녀의 집에 도착한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섹스를 하고,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회상한다.

생애 첫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던 날, 클럽에서 자축하고 있을 때 처음 보는 여자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아는 척을 했다. 그녀는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아는 척하고 함께 술을 마신다. 그녀가 착각한 남자는 그녀가 중학생이었을 때 교회에서 중등부 교사를 맡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짝사랑했고,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던 거였다.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스를 하고, 빗소리를 들으며 그날 밤을 함께 보낸다. 다음 날 아침 모텔에서 일어났을 때, 그녀는 내게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그녀는 내가 ‘선생님’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 눈치챘느냐고 묻는 내게, 그녀는 어제 일은 술에 취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원래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서만 살아왔다. 클럽에서는 춤만 추고 오는 것도 그 계획의 일부다. 한 번도 어기지 않았던 그녀의 계획이 무너진 것은 어젯밤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침대 위에서 오늘 할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그 첫 번째는 조조영화를 보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이미 1시가 넘어갔음을 알게 된 우리는 뒤늦게 계획을 취소한다. 게다가 비에 젖은 옷에서 견딜 수 없는 쉰내까지 풍기자, 우리는 모든 계획을 뒤로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일주일 뒤, 그녀에게서 연락이 온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알고 싶었으니까요”라고 대답한다. 오후 훈련 중에 갑자기 나타난 그녀 때문에 나는 제구가 흔들리고 얕잡아 봤던 후배 타자에게 신나게 얻어맞는다. 나중에야 그녀는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말해준다. 인터넷으로 대학야구 경기를 검색하고 학교를 알아낸 뒤 야구전문지 기자라고 속여 조교실에서 연락처를 얻었다. 그녀 본인도 일이 그렇게 쉬울 줄은 몰랐다고 고백한다.

뉴질랜드에서의 둘째 날. 늦잠에서 깨어보니 그녀는 학교에 가고 없다. 나는 집 주위를 산책한다. 멀리 보이는 양떼가 있는 곳까지 가보려 하지만 그들은 보기보다 멀리 있다. 나는 다시 되돌아와 그녀가 해놓고 간 볶음밥을 먹는다. 그때 침대 아래에서 꿈틀대는 뭔가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란다. 그녀가 키우고 있는 로키라는 이름의 토끼다. 로키는 전화선을 갉아먹고 있다. 어째서 토끼가 전화선을 갉아먹고 있는지, 그게 맛이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다. 언젠가 로키가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말 것이며, 그러면 나는 이 외딴 곳에 고립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날 저녁,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우리는 로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모든 전선줄을 테이프로 감아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식료품과 함께 여분의 전선줄 몇 개를 산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내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묻는다. 그녀도 나도 사정은 빠듯하다. 난 그녀에게 불안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야구밖에 없다. 그녀는 야구를 잘해서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오빠가 불구가 돼도 난 오빠를 사랑할 거야”라고 그녀는 말한다.

첫 번째 주말. 우리는 무리와이 비치(Muriwai Beach)로 피크닉을 간다. 찍은 사진들을 보며 그녀는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한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이 더 좋다고 한다. 왜냐고 묻자, 그녀는 “사랑해”라고 내게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을 영어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훌륭한 예시라고 생각하며 감탄한다. 우리는 지나가던 키위 부부에게 사진을 부탁한다. 사진 속의 우리는 키스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역광인 탓에 우리는 실루엣만으로 남아 있다. 그들이 우리라는 사실은 언제까지나 우리만이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사진이 더 특별한 거라고 그녀는 말한다.

2주가 좀 지났을 때, 결국 로키는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만다. 사두었던 전화선은 규격이 맞지 않는다. 나는 마트까지 걸어가 보려고 시도하지만 중간에 길을 잃는다. 나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지나가던 차의 도움으로 인근 마을에 있는 경찰서에 도착한다. 경찰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여권 번호며 이름 등을 종이에 적어준 뒤, 나는 벤치에서 잠이 든다. 그녀는 실종신고를 내고, 새벽녘에 경찰서로 나를 찾아온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그녀는 내 팔을 풀어내며 말한다. “오빠는 도움이 안 돼. 날 도와줄 수 없어.”

다음 날 그녀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사과한다. 집에 돌아오면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서 무서웠다는 것이다. 그날 그녀는 학교를 하루 쉬고, 나와 함께 카지노에 가기로 한다. 우리는 적은 돈으로 나누어 오래 베팅한다. 초심자의 행운이랄까, 슬롯머신으로 1250달러를 번다. 나는 더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지만, 그 탓에 여기까지만 하자고 그녀에게 말한다. 운이 도와준 것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카지노에서 돈을 따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허락했을 때뿐이니까. 그날 밤 그녀는 돈이며 남자친구며 필요한 모든 것이 있고, 지금은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다섯 번째 주말. 비가 내리고 바람이 몹시 분다. 그녀는 기분이 우울하다며 팜스프링스(Palm Springs)에 가기로 한 계획을 취소한다. 그녀는 내게 떠날 거냐고 묻고, 나는 언젠가는 그래야 할 거라고 대답한다. 그날 저녁, 바람소리에 깨어보니 그녀가 침대에 없다. 문이 열려 있고 비가 들이친다. 느닷없이 한 동양인이 뛰어들어와 뭐라 급하게 소리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헨리라고 말한다. 그를 따라가 보니 그녀가 파자마 차림으로 도로에 쓰러져 있다. 차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때마침 도착한 경찰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병원으로 옮긴다.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1인실 안에서 여의사와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그 안에서 몇 번이나 울음을 터뜨린다. 경찰은 집까지 우리를 데려다준다. 그녀는 다른 말은 없이 피곤하다며 침대에 올라가 잠이 든다.

다음 날 나는 헨리에 대해 묻는다. 그녀는 친구일 뿐이라고 말하고는, 나 때문에 자신은 친한 친구들과도 헤어졌다며 오히려 화를 낸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일주일 뒤, 병원에서 편지가 온다. 정신과 상담의가 보내온 소견서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 편지지를 뜯는다. 내가 오기 전까지 그녀는 1년 넘게 중국인과 동거를 했고, 그녀는 그 중국인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왜 자신이 그에게 전화를 했는지, 왜 차에 뛰어들었는지는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꺼내 보여주며 추궁한다. 그녀는 오히려 내가 뉴질랜드에 오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나를 비난한다. 헨리는 그녀에게 집과 차를 얻어주었다. 그녀에겐 낯선 땅에서 위로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서로를 할퀴는 말들 끝에 그녀는 내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그녀가 내게 헤어지자고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헤어지자는 말을 무수히 반복했고, 다음 날이면 항상 사과했다. 그녀는 헤어지자고 말한 건 거짓말이라고 했다. 다음에도 헤어지자고 말한다면 무시해버리라면서 약속을 강요했다. 그러면 나는 마지못해 약속을 했고,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벌써 수십 번 되풀이된 일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모든 것을 끝내야 할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셔널 컬리너리 페어에 참가하는 그녀를 배웅해준다. 나는 짐을 싸고, 들판으로 나간다.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지평선까지 가보기로 한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사방이 똑같은 들판으로 둘러싸여 있다. 거기에 몸을 뒤흔드는 거센 바람까지 불자 두려워져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상을 타서 돌아오고, 나는 축하해준다. 나는 한국에 돌아갈 계획을 밝힌다. 그녀는 내게 무엇을 하든 잘할 거라고 한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소원이라며 키스를 하고 싶다고 말해서 우리는 키스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가 변했고, 영원히 변해버렸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내 옆에서 자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는 함께 잠이 든다.

그날 저녁, 브레이크 소리에 잠에서 깨어 보니 그녀가 없다. 비가 내리는 도로에 그녀가 쓰러져 있다. 차에 치인 그녀는 피를 흘리고 있다. 나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달린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음이 확실해진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을 달리는 동안 차에는 기름이 떨어져간다. 여기가 어디냐고 나는 묻지만 그녀는 신음소리만을 흘리고 있다. 나는 다 왔다며 거짓말로 그녀를 안심시키려 한다. 하지만 차는 여전히 캄캄한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멈추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다.

전민석
#동아일보 신춘문예#중편소설#다른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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