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신춘문예 2015]아돌프와 알버트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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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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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당선작]한정현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그는 주로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나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곤 했다. 그는 책의 여러 페이지에 줄을 그었으나 시간이 흐른 뒤에 노트에 옮겨 적은 구절은 이런 것들이었다.

수학 법칙은 현실을 설명하기엔 확실치 않고, 확실한 수학 법칙은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완성한 직후 남긴 말이었다. 사실 학창 시절 아인슈타인은 수학 낙제생이었다. 그가 새로운 가설을 세울 때마다 그의 곁에서 수학 공식을 대신 풀어준 친구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뉴턴의 법칙을 신봉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가하면 또, ‘나의 투쟁’의 뒤편엔 이런 구절을 적어 놓았다. 알 수 없어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요. 이것은 히틀러가 자신의 가족에 대해 조사했던 나치스의 친위대장 힘러에게 했던 말이었다. 게르만 민족만이 최고라는 믿음을 심어줘야 했던 나치스는 히틀러의 혈통에 대해 조사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히틀러의 큰형은 미치광이였고 조카는 그의 집요한 구애를 견디지 못해하다가 자살했으며 동생들은 히틀러에게 총을 겨눈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히틀러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그 오스트리아인은, 그러나 그의 친아버지인지조차도 확실치 않았다. 이 모든 사실은 먼 훗날, 그러니까 히틀러가 자신의 숨겨 놓은 여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지하 벙커에서 자살한 후에야 비로소 그녀의 존재와 함께 밝혀진 내용이었다. 물론 그는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죽고 이십여 년이 흐른 뒤에야 그 구절에 관한 내용을 접할 수 있었지만, 긴 시간이 무색할 만큼 그 구절을 자주 중얼거렸다.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그가 왜 그 구절들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왜 하필 ‘나의 투쟁’과 ‘특수상대성 이론’에 심취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히틀러와 아인슈타인은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인물들이라는 것 이외엔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다. 무엇보다 히틀러는 나치스였고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이었다.

그가 이 구절들을 반복적으로 읽어대던 시절, 그는 자신이 군인이 되거나 물리학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만약 조국인 호주를 떠난다면 그건 전장에 뛰어들어야 하거나 우주를 탐험해야 하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그 책들에 심취해 있던 시절, 소련의 흐루쇼프는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심했고 케네디는 그에 맞서 해상 봉쇄를 선언했으니 말이다. 바야흐로 1960년대였다. 소련과 미국이 경쟁하듯 달에 우주선을 쏘아 올리던 1960년대. 그러나 미국의 젊은이들이 핵보다는 에이즈를 더 두려워하게 되고, ‘나의 투쟁’이나 ‘특수상대성 이론’보다는 보니 앤 클라우드와 같은 청춘영화의 스냅사진이 잔뜩 실린 잡지를 더 즐겨 보게 되었을 때 그가 호주를 떠나게 된 건 히틀러나 아인슈타인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군인이나 물리학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언어학자가 되어 호주를 떠나게 되었다. 그가 지원한 국가인 한국은 전장도 아니었고 달의 뒷면도 아니었다. 그저 동북 끝에 위치한 생소한 언어를 쓰는 작은 나라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한국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한국에 지원하기 몇 달 전까지 그는 박사 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한 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논문의 연구 대상은 호주 북부 원주민들의 언어인 카야르딜드어였다.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 카야르딜드어에도 고유의 법칙이 존재했다. 카야르딜드어 화자들은 자신의 감각이 아닌 나침반의 방위를 기준으로 언어를 구사했다. 그가 카야르딜드어를 배우면서 가장 어렵다고 느꼈던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카야르딜드어를 사용한다는 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겨우 자신보다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우선시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을 때였다. 연구는 논문의 마지막 장을 다 채우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카야르딜드어의 마지막 화자는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노쇠해지고 있었다. 마지막 화자의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을 오해 없이 말하려 했던 언어 하나가 완벽히 소멸했다. 논문은 완성되지 못했고 심사는 기일을 정하지 못한 채 미뤄졌다. 새로운 연구 주제에 대해 언급하는 지도교수를 보며 그는 언젠가 카야르딜드어의 마지막 화자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카야르딜드어를 쓰는 부족에게는 반드시 다른 언어를 쓰는 부족과 혼인해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가정에서는 평균 여섯 개 정도의 언어가 사용되었다. 다른 부족의 언어를 인정하는 것이 그들에겐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많은 언어를 사용하죠? 유럽이나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오로지 단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의 물음에 카야르딜드어의 마지막 화자는 진심으로 의아한 표정이 되어 이렇게 되물었다.

단 하나의 언어로 어떻게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는 곧 단일어를 쓰는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한국이란 나라에서 언어적 특이점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국어 중 일부가 한국전쟁 이후부터 원래 의미와 다르게 사용되거나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한에서는 빨강, 제복, 동무와 같은 단어들이, 북한에서는 반동분자와 같은 단어들이 사라졌거나 삼십여 년 전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는 여태 한 번도 관심 가진 적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는 한국에 대해서도, 한국어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랜 시간 연구해 온 카야르딜드어에 대해서도 그가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로부터 3개월 후 그는 한국 땅을 밟기 위해 짐을 꾸렸다. 데이비드 쉐이퍼. 호주 국립대학 문화역사 언어학 전공. 학생증 위에 쓰인 단 두 문장만이 그를 입증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비행기를 타기 전 학생증을 여행가방 안쪽에 꿰매어 넣었다. 여권을 찾으러 들어갔던 방구석에서 ‘나의 투쟁’과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견하여 잠시 서성이기도 했으나 그는 결국 조금 더 가벼운 가방을 들고 비행기에 오르는 편을 선택했다.

한국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에서야, 그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죽은 뒤 자신이 평생 이와이자어를 가르쳤던 호주 북부 아넘랜드의 한 마을에 묻혔다. 아버지의 꿈은 그곳에 이중 언어·이중 문화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 학교의 가치를 말할 때면 ‘ganma’라는 은유를 사용하곤 했다. ‘ganma’란 강을 따라 흘러 내려가던 민물 기류가 반대로 유입되는 바닷물과 섞이는 특별한 혼합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나 말투, 행동이나 체취보다 ‘ganma’라는 단어가 먼저 생각나곤 했다. 그 또한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그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는 이와이자어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언제나 발끝만 내려다보며 입을 다무는 그에게 마을 사람들은 염려의 눈길을 보냈다. 그들은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의 언어’를 부여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누구든 이와이자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아이도 곧 여러분과 이야기할 수 있답니다”라고 유창한 이와이자어로 그를 감싸주곤 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아버지를 보며, 그는 아버지가 제법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아들의 언어보다 이와이자어를 더 잘 아는 아버지’로서 말이다.

(중략)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전날 학교 축제에서 만난 여자와 이제 막 관계를 가지려고 하던 참이었다. 발기된 페니스 때문에 지퍼를 제대로 잠그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달음에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도 그는 전혀 울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난 직후에는 성당 구석에서 여자와 관계를 갖는 것까지 성공했다. 도무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얼굴이나 체취 대신 ‘ganma’, 자꾸만 낯선 그 이와이자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러 집으로 돌아간 것도 장례식을 치르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어디선가 이와이자어로 말하는 낯선 방문객이 불쑥 등장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겨우 집으로 돌아간 그가 아버지의 방문을 열었을 때 다행히 낯선 이와이자어로 말하는 화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데이비드 쉐이퍼, 그의 눈에서 눈물이 조금 나왔을 뿐이었다.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빵조각, 그 옆에 말라붙은 딸기잼, 돌돌 말린 채 책상 밑에 던져져 있는 양말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중년 남성의 소지품들을 정리하면서 이상하게도 눈물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애써 눈물을 참으며 책상 위에 놓인 소지품들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서랍을 열었을 때였다. 그는 서랍 안에 놓인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사진 속에는 그의 나이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와 그와 엇비슷한 또래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감색의 정장 재킷에 붉은 꽃 한 송이를 단 채 최대한 늠름해 보이려 애쓰는 표정이었고 아버지 곁의 여자는 프릴이 많이 달린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실밥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원피스의 치맛단을 보니 싸구려가 분명했다. 아버지의 정장도 썩 다르지 않았다. 바지 길이가 껑충한 것이 누군가에게 빌려 입은 것 같았다. 건강한 혈색에 새까만 눈썹을 가진 여자는 이 사진을 찍고 이 년 뒤에 죽을 거였다. 그는 사진 속 젊은 부부를 보며 이번엔 좀 펑펑 울었다.

(중략)

현장 언어학자란 소규모 집단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록되지 않은 언어나 사라진 언어를 발굴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서른 살의 호주인 데이비드 쉐이퍼가 현장 언어학자로서 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단순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현장보다는 학내 연구실에서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애당초 그가 지원한 서울의 대학에 파견되지 못했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몇 시간이나 남쪽으로 내려가야 닿을 수 있는 도시의 대학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그가 파견된 대학엔 언어학과가 없었다. (중략) 어학원에 배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날, 그는 어린 시절 참석했던 아넘랜드의 한 부족 장례식에서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와이자어로 진행되는 장례식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그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곧 다시 장례 절차를 기록하며 글쎄, 이렇게만 대답했다. 그런 아버지를 잠시 올려보던 그가 되물었다.

아빠는 이와이자어를 알아들을 수 있잖아, 늘 이것만 생각하잖아.

어린 시절 그가 잠시나마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때가 있었다.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대화하는 아버지가 대단해 보였던 것이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던 아버지는 장례 절차를 기록하던 노트를 덮은 뒤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앞에 앉았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해서 모두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아니란다.

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아버지는 다시 일어섰다. 늘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시 노트를 펼친 아버지가 매우 정확한 영어 발음으로 그렇게 덧붙였다. 훗날, 그가 언어학을 전공으로 선택할 때 그는 아버지의 그 말을 참고했다.

(중략)

그러니까 사실 그 도시에서 그를 정말 곤혹스럽게 한 건 그의 소속이나 강의, 국적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 건 그 도시 사람들의 대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그곳의 사람들에겐 독특한 대화 습관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침묵이었다.

(중략)

그가 있던 도시에서 남쪽으로 한참을 더 가야 하는 항구도시의 미국 대사관이 화염에 휩싸였던 것도 5월이었다. 그곳만큼 격렬하진 않았지만 그해 5월 그가 있던 도시에서도 어김없이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대학 캠퍼스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모든 수업 또한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날도 그는 자신이 맡은 영어회화반의 수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가 맡았던 영어회화반은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수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학기의 삼분의 일이 이미 지난 후였지만 수강생들은 그날도 여전히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은 김옥희입니다.

그날 수업에서는 옥희라는 여학생이 영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강의실 맨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옥희라는 이름을 소리 내지 않고 따라 발음해 보았다. 옥희, 옥희. 외국인인 그에게 쉽지 않은 발음이었다. 옥희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는 조용한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평소 웃음을 꾹 참는 것 같은 미소만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수업에 참여할 땐 조금 다른 모습이 되었다. 특히 더듬거리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모습은 다른 학생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한국 여자들의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옥희의 얼굴은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옥희의 얼굴을 확실히 인식할 무렵, 그는 그녀를 보며 종종 자신의 어머니가 입었던 싸구려 프릴 원피스를 떠올렸다. 옥희의 검은 눈은 어머니보다 길고 작았지만 어쩐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나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중략)

옥희가 동생에 대해 뭔가 더 설명하려 했을 때였다. 네 동생은 이제 죽었잖아. 누군가 옥희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곧 의아한 표정으로 옥희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표정은 마치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사람처럼 안정적이었다. 잠시 후 옥희가 다시 말했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습니다. 소란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분명 저들끼리 웅성거리고 있었다. 혹시 네 동생이 죽었니?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거에 있었지만 현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형 시제 대신 과거형 시제를 써야 한다는 설명도 조금 망설인 후 덧붙였다. 그러나 옥희는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단단한 눈빛이 되어 ‘있었다’라는 과거형 시제는 쓰지 않겠다고 했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습니다. 옥희는 반복해서 말했다. 그때 그는 그저 옥희가 동생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가 잠시 동안 ‘이와이자어는 과거형과 현재형과 미래형을 모두 한 문장에 표현할 수 있다’던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그날 도청 앞에서 네 동생을 본 사람이 있어!

견딜 수 없다는 듯 누군가 일어나 소리쳤다. 순간 웅성거림은 침묵으로 바뀌었다. 그 침묵은 일종의 강요된 것이었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는 자를 목격했을 때의 침묵, 강요된 복종을 거부하는 자를 바라볼 때의 침묵, 부당한 것에 대한 억울함보다는 공포가 더 선명하게 보일 때의 침묵. 그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침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일생 동안 그런 침묵을 겪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마주친 적은 있었다. 바로 이 나라에서였고 이 도시에서였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어떤 순간이 되면 모두 의식적으로 침묵했다. 그는 그 침묵 사이에서 말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걸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그가 했던 일이라곤 옥희를 보며 그저 가슴께를 한 번 만져 본 것뿐이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말 대신 목을 타고 넘어오는 게 느껴졌다.

한국전쟁 직후 남한에서는 빨갱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고 빨강이라는 단어는 사라져야 했다. 삼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특정한 단어들과 그 의미는 이런 식으로 상실되었다. 가령 동무라는 단어는 남한에서 더이상 친구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그러한 단어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거나 오로지 누군가를 상처내고 오해하기 위하여 선택되었다. 그런가 하면 어떠한 단어들은 침묵 속에서만 발음되기도 했다. 이 도시의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단어들이 바로 그런 종류였다. 물론 그 단어들 사이에는 옥희의 동생과 같은 사람들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에겐 동생이 있습니다.

침묵 속에서, 옥희가 다시 한 번 느리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처음 호주를 발견했던 영국인들은 토착 원주민이었던 태즈메이니아인들을 무차별 강간하고 사살했다. 대부분의 태즈메이니아 여인들은 발가벗겨진 채 숲 가운데 세워져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었고 어린아이들은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땅에 묻혔다. 남성들이 생포된 경우엔 성기를 잘라내고 가죽을 벗겼다. 노인들은 산 채로 결박당한 채 부족이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영국인들은 태즈메이니아인들을 사살하기 전 그들에게 영어로 ‘살려 달라’라고 외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아무도 살려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체 왜 살려 달라고 하지 않지? 영국인들이 물었을 때 가장 나이 많은 장로가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말했소, 우리의 언어로 말이오. 태즈메이니아인들이 영어로 살려 달라고 하지 않은 건 분노나 적대감 때문이 아니었다. 장로는 그저 피로한 듯, 그러나 당당한 말투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들에게 당신들의 아버지가 있듯이 우리에겐 우리들의 아버지가 있잖소.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훗날 이 끔찍한 태즈메이니아인 학살 사건은 많은 역사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언어학자들 또한 학살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소실되거나 왜곡된 그 부족의 언어를 찾아 나섰다. 데이비드 쉐이퍼의 아버지도 그중 한 명이었다.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던 그의 아버지는 평생 단 한 편의 논문을 남겼고 그것이 바로 태즈메이니아 언어에 대한 연구였다. 그러나 그 논문은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늘 미완성인 채였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태즈메이니아인들은 어떤 순간이 오면 늘 침묵했다. 그들의 언어에서 학살, 영국인, 태즈메이니아 언어 같은 단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논문 안에서 의도적으로 아버지라는 단어를 배제한 채 문장을 써나갔다. 논문의 제목은 공란으로 남겨두고 발표했다. 아버지의 논문은 공격과 혹평을 동시에 받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더 이상 연구실에 남아있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학살은 태즈메이니아인들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일생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비록 대학의 연구실에서는 나와야 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마저 그곳에 두고 나오진 않았다. 아버지는 호주의 또 다른 소수 언어를 찾아 북부 아넘랜드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평생 발굴하고 기록하게 될 언어인 이와이자어를 알게 되었고 그의 일생 내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 한 명의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여인이 바로 데이비드 쉐이퍼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중략)

번번이 아버지 핑계를 대곤 했지만, 사실 그가 언어학을 전공했던 건 가장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에 대한 선택이었다. 어떤 것이든 결국 완벽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영원히 알 수 없는 쪽을 선택하는 편이 낫지 않나 했던 것이다. 호주를 떠날 즈음에는 그런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까지 믿게 되었다. 아버지의 평생이 담긴 이와이자어는 단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고 도와줬던 친구들에겐 모두 배신당했으며 연구하던 카야르딜드어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원한 침묵 속에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알고 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가 한국을 선택했던 건 차라리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이방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처음에 그는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지도, 거리를 부지런히 살피며 걷지도 않았다. 그러나 옥희를 만나고부터 그는 집보다는 바깥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조금씩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졌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졌다. 그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니, 모든 것이 조금씩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옥희.

그가 옥희와 결혼을 결심할 무렵 그는 처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옥희에 대한 이야기였다. 발음의 한계로 그가 자꾸만 오키,라고 발음하면 몇몇 주한미군 출신의 미국인들이 해방촌 뒤의 ‘오케이 걸’이 떠오른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이상하리만큼 화를 내곤 했다. 옥희는 말이 없고 조용한 여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만한 여자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에겐 매우 어려운 여자였다. 옥희의 눈썹이 조금만 처져도 그는 종일 연구실 안을 서성이며 불안해했고 옥희가 조금만 크게 웃어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그는 옥희를 알게 되면서 이전보다 자주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 사진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가 돼서야 환하게 웃는 어머니 곁에서 애써 늠름한 표정을 지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같은 표정을 짓는 순간이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렇듯 아무런 노력 없이도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것이 있는 반면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에겐 한국어가 그랬다. 시간이 흘러도 그의 한국어 실력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중략) 우선 옥희는 영어를 할 줄 알았으며 한국어로 말하는 속도도 매우 느린 편이었다. 부부로 사는 세월이 늘수록 자연스레 대화는 줄어들었다. 그는 그와 옥희가 말이 없어도 서로를 이해하고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동안 언어에 대한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다시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느낀 건 옥희의 고등학교 동창들이 놀러왔을 때였다. 집에 오는 손님은 드물었지만 어쩌다 서로의 손님을 맞게 되면 옥희와 그는 약속이라도 한 듯 번갈아가며 집을 비워주곤 했다. 그날도 그는 꽤 늦게까지 학교의 연구실에 있다가 집에 들어갔다. 이른 퇴근이 아니라고 여겼는데도 대문 너머로 여전히 웃음소리가 넘어오고 있었다. 바깥에서 시간을 좀 더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던 그는 문득 거실 창 너머로 무엇인가 열심히 말하고 있는 옥희를 보게 되었다. 옥희는 곁에 앉은 친구의 팔을 때리며 웃기도 했고 어느 순간엔 열변을 터뜨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친구들은 옥희의 이름을 자주 불렀다. 옥희야, 옥희야. 순간, 그는 집으로 들어가 다른 이들과 함께 옥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그리고 오키가 아닌 옥희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불러보고 싶어졌다. 다음 날 그는 한국어 강좌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해, 그가 맡은 영어회화 반의 강좌수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그는 한국어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옥희 발음은 다음 해가 지나고 그 다음 해가 되어서도 그대로였는데, 물론 이번엔 그의 직업이나 강좌 개설 여부 때문은 아니었다. 그와 옥희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서 그는 한국어보단 가장의 노릇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옥희와 그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였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바깥에 중요한 물건을 두고 들어왔다가 기억해낸 사람처럼 문득 옷장 안에 넣어 두었던 여행 가방을 떠올렸다. 그리고 곧장 여행 가방 안주머니 부분을 뜯어냈다. 그곳에서 그는 앳된 데이비드 쉐이퍼의 얼굴이 있는 학생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만 서른의 데이비드 쉐이퍼가 그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사진을 보고 옥희를 한 번 봤다. 그리고 옥희와 그를 반반 섞어 놓은 것 같은 갈색 머리의 아이를 보았다. 그가 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피로한 음성으로 옥희가 천천히 물었다.

호주에서 아이에게 처음 가르치는 말은 뭐예요?

호주에서는 아이가 처음 글자를 배울 때 동물들의 이름을 익히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애버리지니어를 쓰는 호주 최대 원주민 부족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캥거루.

캥거루? 옥희가 미소를 머금듯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아버지도 처음 그에게 글자를 가르쳐줄 때 캥거루라는 단어를 노트 한 가득 써서 보여주었다. 캥거루, 캥거루. 머뭇거리듯 더듬거리며 그가 캥거루를 발음하자 그의 아버지는 우선 박장대소했지만 눈가는 촉촉했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그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를 바라보던 옥희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거예요? 잠시 옥희를 바라보던 그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른다.

캥거루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라는 뜻의 애버리지니어였다. 그는 조그맣게 캥거루라고 다시 발음해 보았다. 그는 그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옥희와 그의 첫 아이의 이름은 유진이었다. 한국식 이름이었다. 한국인으로 살 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이름을 한국식으로 지었다고 해서 한국인으로 사는 건 아니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 동안, 후에 그가 사석에서 언급한 바로는, 그가 데이비드 쉐이퍼가 아니고 신동일이 되어서까지 그의 삶에서 정말 잘했다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아이들의 이름을 한국어로 지은 것이라고 했다.

그가 혼자서도 별 무리 없이 공과금을 납부하고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만큼 한국어가 능숙해졌을 즈음이었다. 건강 검진에서 옥희는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곧장 항암치료를 받았으나 약물은 오히려 옥희를 조금씩 사라지게 하는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은 마치 오래된 점퍼 안의 솜처럼 빠지기만 했고 환자복은 나날이 그 치수가 커져갔다. 달라지지 않는 건 옥희의 말수와 미소뿐이었다. 병원에서도 옥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웃음을 참는 것 같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까다로운 한국어 문법도 틀리지 않을 수 있었고 어려운 발음도 정확하게 소리 낼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옥희에게는 그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옥희가 그의 곁을 떠나던 날, 그날도 그는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한국어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동사의 과거완료형 시제에 관한 내용이었다. 한국인들이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교수님, 영국인들은 인생의 시간을 너무 완벽하게 나누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한 학생이 그에게 말했을 때였다. 그는 달려온 조교로부터 옥희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의사의 사망 판정을 들은 뒤에도 그는 그저 옥희의 마른 발에서 가만히 양말을 벗겨냈을 뿐이었다.

(중략)

아버지는 평생 대체 어디에 계시는 거예요?

울지 않는 그를 보며 유진은 어린아이처럼 더욱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그는 유진에게서 오래전 데이비드 쉐이퍼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째서 그렇게 평생 이와이자어를 보존하고 이해하려고 애썼는지, 그에 비해 왜 아버지 자신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그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또다시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략)

옥희의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하기 전날이었다. 납골당에 놓아둘 옥희의 소지품 몇 개를 챙기기 위해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은 옥희가 입원하기 전과 똑같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옥희는 딱히 취미가 있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사 모으지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옥희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생각나지 않자 그는 난감해졌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ganma’가 떠오르는 것처럼, 누군가를 추억하거나 생각하기엔 그렇게 명백한 무언가가 있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망연히 서서 집 안을 둘러보던 그는 이윽고 안방의 옷장과 서랍을 차례로 열어 보았다. 오래 입은 옷 몇 벌과 입원하기 전날까지 입었던 작업복이 잘 개켜진 채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잠시 옥희와 평생 함께했던 방을 둘러보았다. 옥희가 원래 이 집에 없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흔적이 별로 없었다. 그는 옥희를 안 적이 없었던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옷 몇 벌만을 챙겨 나오려던 그는 마지막으로 화장대 서랍장을 열어 보았다. 아버지의 방문을 열면 이와이자어 화자가 나오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옥희의 서랍장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러나 그가 옥희의 서랍을 열었을 때, 그제야 그는 평생 제대로 부르지 못했던 옥희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나의 언어.

그는 그때까지 서른 살 데이비드 쉐이퍼의 학생증 위에 쓰인 언어가 곧 자신의 언어라고 생각해왔다. 유진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 남편이 싫어하는 것, 남편에게 챙겨주어야 할 것들’ 이러한 메모가 가득한 편지를 서랍 안에서 발견한 순간 그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호주를 그리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조국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평생 한국과 호주를 떠돌며 찾았던 자신의 언어가 무엇인지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음 날 그는 옥희의 편지를 유골과 함께 안치하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후 그는 신동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귀화 신청을 했다. 그는 신동일이라는 이름과 한국 국적을 얻은 후 오 년을 더 살았다. 그 오 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옥희가 안치되어 있는 납골당을 찾았고 오키든 옥희든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오 년 중 이 년 남짓은 학교에서의 강의를 이어갔고 이후 거동이 자유롭지 않을 정도로 몸이 불편해진 나머지 삼 년 사이 그는 퇴임하게 되었다. 퇴임 후 이 년여 동안 그는 80년 5월에 사라진 언어들을 정리하여 방송국과 신문사에 보냈다. 그 언어들 중 일부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떠한 것들은 소멸된 이후에야 완벽히 납득되거나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아버지가 그랬고 옥희가 그랬던 것처럼. 급격히 쇠약해진 마지막 일 년, 그는 의사의 허락하에 아버지의 묘를 찾아 호주에 다녀왔다. 돌아와서는 유진과 유정을 불러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나는 한국에, 옥희의 곁에 있고 싶다.

유진과 유정은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죽어서도 아넘랜드에 남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한 번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인생의 절반을 살았던 한국에 대해 떠올려 보았고 나머지 절반가량을 보냈던 호주에서의 날들을 추억했으며 유진, 유정과 함께 보냈던 날들을 더듬어 보았다. 반평생을 일했던 대학교와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도시에 대해 숙고했으며 평생 동안 그의 귓가에 머물렀다 사라진 무수한 언어들을 되짚어 보았다. 그는 여전히 많은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심지어 오래전 호주에 두고 온 ‘나의 투쟁’과 ‘특수상대성 이론’의 뒤편에 적어 놓은 그 구절들을 왜 그렇게 즐겨 읽었는지, 왜 하필 그 구절들이어야만 했는지, 그것조차 여전히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웃을 수 있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언어, 나의 이름.

신동일, 이 한국인은 칠십 세의 나이로 자신이 살았던 한국의 남쪽 도시에서 숨을 거뒀고 유해는 아내인 김옥희의 곁에 안치되었다.

한정현
#동아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아돌프와 알버트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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