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정윤회를 들이든가, ‘문고리권력’ 내치든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30일 21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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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관 3인방 등 십상시 통한 ‘비선실세 국정농단’ 청와대 문건

대통령이 모르고 있었다면 不忠의 참모진에 배신당한 것… 진작 친국해 사실 파악했어야

가족·측근우대 인간본성이되 그런 적폐 깨는 게 국가개조다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대통령은 알고 있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 실세로 알려진 정윤회 씨가 국정에 개입해왔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나는 그게 제일 궁금했다.

장관도 못한다는 대통령 얼굴 보기를 매일 하는 사람들이 ‘문고리권력 3인방’ 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비서관이다. 이들을 포함해 ‘십상시’라는 청와대 안팎 10명을 정윤회가 한 달에 두 번씩 만나 ‘VIP(대통령) 국정운영, BH(청와대) 내부 상황을 체크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있음’이라고 공직기강비서관실 보고서엔 쓰여 있었다.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한 일이라면 대통령은 놀랄 것도 없다. 다만 하필 박지만 측근에게 들키고 신문에까지 나게 하는지, 왜 진작 보고는 없었는지 편치 않을 것이다. 요즘 회동은 잘 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전혀 모르게 해온 일이라면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다. 1998년부터 가족보다 더 신뢰했던 비서 3인방이 박근혜 아닌 다른 군주를 모시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참새가 대붕의 뜻을 어찌 알리오(燕雀不知大鵬)마는 내가 대통령이라면 사실 확인부터 할 것 같다. 청와대는 근거 없는 내용이어서 김기춘 비서실장 선까지만 보고됐다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문건 자체는 알았어야 한다. 누군가 “찌라시를 모은 내용이니 신경 쓸 것 없다”고 알렸더라도 3인방을 불러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속이 시원할 것이다. 조순형 전 의원은 이걸 친국(親鞫)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청와대가 밝힌 것만 보면 대통령은 이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 3인방이나 십상시 또는 정윤회라도 보고라인을 제치고 대통령에게 직보했을 경우가 아니라면, 대통령은 그런 풍문이 나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얘기다. 참모진은 세월호 침몰 당일 틀린 보고에 이어 진도체육관 방문도 “경호에 문제가 있다”고 막아서더니, 대통령과 관련된 보고서마저 선별적으로 올려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이 문건이 사실이라면 이들이야말로 국정을 농단하는 십상시라고 할 판이다.

청와대는 문건이 사실과 다르다며 기세등등 신문사를 고소했다. 하지만 청와대 사정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맞을 것으로 본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시중 루머를 짜깁기해 보고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이 정도 내용이면 당연히 대통령한테 보고돼야 하고, 대통령은 3인방에게 당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의 주군은 정윤회였다”라는 말도 나온다. 이쯤 되면 3인방은 문고리만 잡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권력이다. 인사권의 70% 이상 넘어갔고 정(政)피아나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 인사’가 이들에게서 나온다는 설도 파다하다.

물론 문건에 ‘그만두게 할 예정’으로 언급된 김 실장이 건재한 걸 보면 정윤회가 실세 맞나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 3인방이 정윤회를 만나고 다녔다면 그들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 아닌 다른 사람에게 충성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선출되지 않은 정윤회라는 사람이 책임지지 않는 권력을 휘둘렀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검찰이 수사에 나섰지만 사실이 밝혀지긴 쉽지 않을 듯하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부인하면 그만일 터다. 풍문을 퍼뜨린 사람을 모조리 잡아들이지 않는 한, 신의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대통령이 앞으로도 3인방을 믿을 수 있을지, 그들은 또 대통령을 잘 보좌할지도 걱정스럽다.

이 문제를 조기 종식하는 한 방법은, 정윤회를 비서실장으로 들이는 거다. ‘최태민의 사위’였지만 대통령 스스로 “법적으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실력 있으면 쓸 수도 있는 것”이라고 2007년 말했다. 정윤회가 만난 역술인도 “비선 의혹 받게 하지 말고 차라리 비서실장 시키면 지금(김기춘)보다 훨씬 잘할 것”이라고 했다지 않던가.

아니면 3인방을 내치는 수밖에 없다. 수족 같은 심복이 사라지면 대통령은 불편하겠지만 그냥 두면 국민이 불편하다. 문고리권력 16년간 대통령의 눈과 귀를 차단해온 것도 곱게 봐주기 어렵다. 문건이 사실과 다르다 해도 구설수에 오른 것만으로도 책임질 필요가 있다. 이렇게 엄청난 사안을 대통령에게 보고 없이 뭉개고 비서실 기강 해이는 방치한 김 실장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가족과 측근을 우대하는 건 인간 본성이지만 족벌주의 연고주의를 국정에 앞세운 나라는 망한다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일갈한 바 있다. 비서실 몇 사람 자리 보존보다 대통령이, 나라가 우리에겐 더 중요하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정윤회#문고리 권력#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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