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희균]거대한 사교육이 되어버린 EBS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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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고등학교 2학년 영어 시간에 교과서를 펴놓고 있었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꿀밤을 맞았다면 정상인가?(다른 과목이 아니라 영어 교과서였다!)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두 자릿수 곱셈을 못하는 아이가 27명 중 5명이나 되는데 학교는 이를 전혀 모르고 있다면 정상인가?(두 자릿수 곱셈은 3학년 과정이다!)

이 질문에 “요즘 그렇더라”고 답했다면 우리 공교육의 현실을 꽤나 아는 사람이다. 학년 말을 향해 달려가는 11월의 어느 날, 수도권의 평범한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오류 사태를 겪으면서 수능에 EBS를 연계한 정책이 새삼 도마에 오르고 있다. EBS 교재가 해마다 바뀌는 바람에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으니 수능 오류로 이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이에 대해 EBS는 교재 한 권을 만들기 위해 6개월 이상 4차례의 과정을 거치므로 오류가 거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런데 이 문제의 본질은 EBS의 오류 규모가 아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특정 기관의 교재가 국가시험을 좌지우지하게 됐는지가 핵심이다.

수능에 EBS를 연계하는 정책은 노무현 정부부터 시작됐지만 지금처럼 EBS를 공룡으로 키운 것은 이명박 정부였다. 교육부는 2010년 수능에 EBS를 70% 연계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2011년 수능 영역별 만점자를 1%로 높이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교육부가 내세운 주된 이유는 ‘수능 사교육 감소’였다.

당시 교육부는 대표적인 수능 인터넷강의업체인 메가스터디의 주가 하락을 정책 성과라고 자랑했다. 교육계에서는 ‘정부의 수능 대책=메가스터디 때려잡기’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왔다. 정부가 일개 사교육 업체를 의식해 정책을 펼친 것을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 혹독하다. 고교에서 교사, 교과서, 수업이 실종됐다. EBS는 또 하나의 거대한 사교육이 됐을 뿐이다.

현 정부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포기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흘러갔다. 이 평가는 전국의 초등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해당 학년에 필요한 학업 수준을 갖추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목표다. 국가 교육과정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동시에, 기초학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찾아 지원하기 위한 평가다. 이를 ‘일제고사’라는 음침한 말로 바꿔 마치 전국 아이들을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기 위한 시험인 양 욕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이 평가의 구조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호도하고 싶은 이들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사교육과 경쟁이 과열된다는 일부 여론에 밀려 지난해 초등학교의 평가를 폐지하고, 중학교의 평가를 축소했다. 일선 초등학교 교장들은 각 학년의 아이들이 기본적인 공부를 어느 정도 소화하는지 알 길이 없다고 답답해한다. 낙후지역에서 기초학력 미달 학생이 얼마나 늘었는지, 어떤 학교가 이런 아이들을 방치하는지 정부는 파악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사태는 정부가 교육정책을 만드는 데 있어 공교육의 본질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 범람에 대한 비판을 더 두려워하는 데서 비롯됐다. 경제당국이 물가 관리를 위해 교육부에 사교육을 줄이라고 압박한 것도 한몫했다. 교육 수요자보다 사교육을 더 두려워한 정책들은 공교육을 망치는 결과로 이어졌다.

최근 정부가 수능 영어를 절대평가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과정을 보면 이런 전례가 다시 떠오른다. 공교육에서 영어 교육을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 사교육을 잡겠다고 달려드는 형국이니 그러하다.

‘사교육포비아’에 휩싸여 교육정책을 만드는 것은 전형적인 ‘왝 더 독(wag the dog)’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수록 공교육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
#EBS#사교육#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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