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활]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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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최근 중학교 3학년생이라고 밝힌 청소년이 한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전면 무상급식 시행 전부터 급식 지원을 받은 학생이었다. 그는 “정치인들은 급식 혜택을 받는 아이들이 가난한 것이 알려져 마음에 상처를 입으니 모든 학생에게 무상급식을 하자고 했지만 나는 좋아진 게 하나도 없다”며 이렇게 썼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누가 어려운지 친구들은 알고 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저는 거의 점심 한 끼만 먹는데 급식 수준은 전보다 더 못해졌습니다. 제가 부자아이들 급식지원 하지 말고 어려운 친구들의 방과 후 학습비 지원해달라면 염치가 없는 건가요. 그렇다면 가난한 저희를 위해 무상급식 했다고 하진 말아주세요.”

내 페이스북 친구가 인터넷 링크를 공유해 보내온 이 학생의 글을 읽으며 영국 미래학자 이언 앵겔의 저서 ‘지식노동자 선언’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아동들이 만든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을 미국 상원이 통과시켰을 때 그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공장에서 푼돈을 벌던 방글라데시 어린이들은 직장에서 쫓겨나 쓰레기를 줍거나 매음굴로 떨어졌다.” 앵겔은 지나친 감상주의는 반드시 역효과를 가져온다면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된다”고 강조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한국 정치권에는 ‘공짜 복지’ 열풍이 불었다. 위험성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몇 년도 안 돼 감당하기 힘든 재앙의 조짐이 뚜렷해졌다. 경제성장 둔화와 재정파탄 우려가 겹치면서 보편적 복지라는 이름을 내건 무차별 세금복지의 폐해를 더 늦기 전에 국민이 깨달았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규제 역시 마찬가지다. 2001년 재래시장 및 영세상인 보호와 대중교통 이용 촉진을 명분으로 백화점 셔틀버스 규제가 시행됐다. 취지야 그럴듯했지만 결과는 딴판이었다. 재래시장의 매출은 늘지 않은 반면 승용차를 이용한 고객의 증가로 백화점 주변의 교통체증만 심해졌다. 경제학자인 최승노 박사는 규제가 좋은 의도로 출발했더라도 대부분 현실에서 변질되고 악용되는 ‘규제의 역설’을 경고한다.

무차별 복지가 한계에 부딪히자 정치권에서는 법인세율을 높여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나는 경제정책은 가급적 양 측면을 함께 봐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법인세 인상론은 한심하고 위험한 주장이라고 단언한다. 많은 기업의 실적이 반 토막 나고 앞날도 어두운 현실에서 법인세를 올리면 경제는 파국으로 치닫고 다수 국민의 소득과 일자리에 치명타를 입힐 것이 명백하다. 세계 각국이 재정난 속에서도 법인세를 경쟁적으로 낮추는 것이 기업을 편들기 위해서라고 여기면 큰 착각이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서민을 위해서’라는 말을 즐겨 쓴다. 기업인은 사익을 챙기지만 자신들은 공익을 우선한다는 주장도 한다. 글쎄 그럴까? 정말로 양심적인 정치인이나 공무원도 있겠지만 사적 이익부터 먼저 챙기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유난히 서민을 내세우는 정치인일수록 정작 자기 삶은 서민과 거리가 멀고 이중적인 모습도 지겨울 정도로 봤다.

복지정책이든, 경쟁정책이든, 조세정책이든 가장 염두에 둬야 할 점은 현실적합성과 지속가능성, 국가의 미래와 다음 세대에 미칠 영향이다. 정책의 파장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불쑥 던져놓은 뒤 부작용이 두드러지면 “취지는 좋았는데…”라고 변명하는 3류 관료나 정치인이 끊이지 않는다면 비극이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설익은 정책들의 파열음을 보면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된다’는 경구(警句)를 거듭 실감한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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