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보험 팔며 영업력 키우고… 봉사활동하며 인맥 쌓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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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농업에서 미래를 연다]<下> 스펙 쌓듯이 귀농준비

최근 귀농을 택하는 젊은이들은 무작정 귀농하기보다는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트랙터로
 전국 일주를 한 남광민 씨와 ‘마을 봉사왕’으로 불리는 박덕근 씨, ‘지리산 청국장 총각’으로 유명한 박정기 씨(왼쪽부터).
최근 귀농을 택하는 젊은이들은 무작정 귀농하기보다는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트랙터로 전국 일주를 한 남광민 씨와 ‘마을 봉사왕’으로 불리는 박덕근 씨, ‘지리산 청국장 총각’으로 유명한 박정기 씨(왼쪽부터).
한국농수산대에 다니는 남광민 씨(34)는 올해 8월 트랙터를 타고 전국을 일주했다. 그는 경기 용인에서 출발해 충남 태안, 전남 진도, 경남 산청, 울산과 경북 안동을 거쳐 강원 원주와 평창까지 총 1800km를 순례했다. 전국 일주의 목적은 현장의 ‘선배 농민’들로부터 농업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20여 개 농장의 대표들로부터 농업을 이끄는 리더의 덕목과 한국 농업이 수출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방안 등 ‘살아 있는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최근 귀농을 준비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학생들이 스펙을 쌓으며 입사 준비를 하듯 치밀한 노력을 기울이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귀농에 성공한 젊은이들은 단순히 취업이 어려운 도시를 떠나 도피성 귀농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농업에서 성장 가능성을 보고 적극적으로 전략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대학생이 스펙 쌓듯 차근차근


남 씨는 원래 4년제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뒤 사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시에서 웬만한 사업 분야는 이미 ‘레드오션’이었다. 기왕이면 가업(家業)을 잇자는 생각에 아버지가 하는 양계장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버지의 도매상 영업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 씨는 영업력이 강하기로 유명한 자동차회사에서 판매사원으로, 보험회사에서는 영업사원으로 각각 1년 가까이 일했다. 영업을 경험해본 뒤 양계장에 돌아오니 도매상과의 가격 흥정에서도 무조건 을(乙)일 필요가 없게 됐다. 이후 그는 네덜란드와 독일 등 농업강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연수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남 씨는 현지에서 100년 가까이 4대째 양계업을 하는 네덜란드의 농장을 방문했을 때 농업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농장 사장님이 ‘사람은 4, 5시간마다 배고프다. 사람들이 많이 먹는 계란을 생산하면 (우리는) 절대로 굶어죽지 않는다’는 말을 했어요. 저는 무릎을 쳤어요. 농업에서 식품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기술로 부가가치를 더하면 앞으로도 망하지 않을 사업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됐으니까요.”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엄마의 마음’을 담아 믿고 먹을 수 있는 계란을 생산하는 게 목표다.

○ 홈페이지 하나 없는 젊은 농부

칠갑산 자락에서 ‘청국장 달인’으로 통하는 박정기 씨(28)는 제품 차별화를 위해 부단하게 노력해 왔다. 그의 명함에는 ‘사진작가’와 ‘버블(비눗방울) 아티스트’라는 직함이 붙어 있다. 그는 요즘엔 흔한 홈페이지도 운영하지 않는다. 하지만 연 매출은 1억 원에 이른다.

고등학교 때 그의 성적은 중위권 정도로, 빼어나지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성적이었다. 하지만 각박한 도시생활보다는 훨씬 인간미가 풍기는 농촌생활을 해보고 싶어 귀농했다. 그는 “도시에서 그가 받을 수 있는 시급은 5000원 안팎이었고, 취직 후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보였다”고 말했다.

박 씨는 소일거리로 청국장을 담아 파는 할머니가 계시는 칠갑산 자락의 충남 청양군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사진 찍기와 버블 아트를 배웠다. 그렇게 얻은 인맥은 나중에 좋은 영업자산이 됐다.

소모임 등을 통해 할머니와 함께 청국장을 담그는 모습을 보여준 게 주효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할머니의 손맛으로 아랫목에서 익힌 청국장’의 맛에 열광했다. 그는 사실 온라인 판매를 하면 ‘가격 싸움’이 불가피했다는 판단에서 홈페이지를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최저가 검색이 있는 인터넷에서는 가격싸움을 할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광고를 하면 포털 사이트에 내야 하는 수수료 부담도 만만치 않잖아요. 청국장은 먹는 것인 만큼 신뢰를 주려면 전화로 목소리를 듣거나 얼굴을 통해서 파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지요.”

○ 벽을 허물어라

박덕근 씨(39)는 마을 봉사왕으로 불린다. 연세대 법학과 94학번인 그가 대학에 입학할 때에는 마을 어귀에 플래카드가 붙었다. 이후 그는 남들이 하는 것처럼 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1차 합격은 했지만 최종 낙방하기를 수차례. 마침내 10년간의 고시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부 마을 사람들은 ‘고시에 실패하고 오죽 할 일 없으면 농사지으러 왔을까’라고 수군거렸다.

그는 이런 편견을 깨기 위해 젊은 농부들과 함께 연탄배달 봉사활동을 했다. 벽을 허무는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농촌 역시 도시의 직장 못지않게 인맥이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대학교의 농업 과정과 지방자치단체가 마련한 수업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청년회를 조직했다.

박 씨는 이 과정에서 ‘블루오션’을 발견하게 됐다. 한 농부가 ‘약도라지’를 재배해 보라고 추천한 것이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그러자 연 매출 1억 원가량을 올리는 그에 대한 주변의 시선도 달라졌다. 그는 “자유무역협정(FTA) 등으로 시장이 개방된다고 하지만, 약도라지는 특수작물인 만큼 수요가 높아 망할 리가 없다”며 “농부도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 못지않게 직업적인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지마켓 직원이었던 양용일 씨(26)는 현재 전남 해남에서 정착을 준비하며 고구마밭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그가 어렵사리 취업한 직장에서의 생활은 생각과 많이 달랐다. “20대 중후반에 취업하고, 30대 초중반에 결혼하면 돈을 모을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정작 제가 40대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 향후 30∼40년을 위해 준비된 게 없고, 또다시 인생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양 씨는 ‘남의 인생을 사는 것보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해 올해 8월 퇴사했다. 이후 농촌진흥청에서 마련한 귀농학교에 들어갔다. 주변에서는 “취직하기 힘든 시기에 미쳤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도시에서는 젊음이 ‘범용재’이지만, 농촌에서는 ‘희소한 자원’”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선택을 밀어붙였다.

“해남에서는 바닷물로 고구마를 기르는 ‘해수농법’이 유명해요. 친환경농법으로 화학농약이 필요 없지요. 당장 농사를 짓지는 않을 계획입니다. 내년 봄에 고구마 기르는 분 밑에 들어가서 일을 배운 뒤 적어도 1, 2년 지난 뒤에 밭을 사서 농사를 시작할 겁니다.”

김유영 abc@donga.com·김범석 기자
#봉사활동#농업#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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