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엇박자로 춤추는 한국과 일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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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국제부장
이진 국제부장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시시포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올려놓으면 이내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무거운 돌을 가파른 언덕 위에 다시 올려야 하는 형벌의 주인공이다. 무한반복의 헛된 노력을 빗대 말할 때 흔히 시시포스를 끌어온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시시포스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든 것은 이달 초였다. 독도에 지으려던 피난시설 공사를 갑작스레 취소했다는 보도가 나온 시점이었다.

정부는 신축공사 가격 변경을 취소 이유로 내세웠다. 곧이어 일본 정부 대변인이 공사를 국가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고 했다. 그제야 공사 취소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이 공사 취소를 알리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려 한 반면 일본은 기자회견을 통해 분란거리로 만든 셈이다.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한일관계는 과거사 사과와 도발의 악순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1983년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이때 그는 “한일 양국 간에는 유감스럽게도 과거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 보면 ‘이게 무슨 사과인가’라고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일본 총리 입에서 이 수준의 발언이 나오기까지 광복 뒤 38년이 흘러야 했다.

이듬해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을 때는 히로히토 일왕이 직접 나섰다. 일왕은 만찬사에서 “금세기 한 시기에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일제강점 36년의 과오에 사과의 뜻을 처음으로 공식 표명했다’고 전했다.

한번 물꼬가 터지자 ‘사과의 릴레이’가 이어졌다. 1990년 아키히토 일왕은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표명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는 1993년 경주를 찾아 “가해자로서 우리가 한 일에 깊이 반성하며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진사(陳謝)드린다”라며 머리를 숙였다.

이런 흐름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내놓으며 정점을 찍었다. 이 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 반성과 사죄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넣은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 한반도 전문가인 오코노기 마사오 동서대 석좌교수는 이 선언을 ‘1965년 체제’를 대신할 ‘1998년 체제’로 규정하며 한일이 진정한 화해의 길로 들어섰다고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우호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고비마다 제동이 걸렸다. 역사 교과서와 일본군 위안부, 독도 영유권,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가 지뢰 터지듯 폭발했다. 일본의 작용은 매번 한국의 반작용을 불러와 항의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질 때가 많았다. 일본에서는 도대체 얼마나 더 사과해야 하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간신히 한 걸음 내디디면 세찬 맞바람이 몰아쳐 두 걸음 밀려나는 형국이었다. 30년간 외교관으로 일했던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는 신간 ‘한일관계 50년, 갈등과 협력의 발자취’에서 ‘한 정권이나 정치 지도자 차원에서 과거사를 청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까지 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조기 총선 카드를 꺼내들었다. 장기 집권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 승부수다. 유권자들은 단순히 세금 인상을 연기한다는 내용만 보고 표를 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집단자위권 각의 결정이나 원전 재가동, 한국·중국과의 외교 불화 등도 심판의 잣대가 될 수 있다. 넓고 길게 보면서 최소한 주변 국가를 이해할 정당과 후보를 선택해 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이진 국제부장 leej@donga.com
#시시포스#한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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