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37>물방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물방울
-최해돈(1968~)

비 오는 날. 물방울. 물방울. 보도블록 위에 외출 나온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이 톡톡 튕긴다. 물방울이 걸어온다. 걸어오면서 울고 있다. 울고 있는 물방울 옆에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이 외출 나온 보도블록 위에 고요가 한 켤레 두 켤레 쌓인다. 그 고요 위에 물방울이 깨알처럼 쏟아진다. 이쪽에도 물방울. 저쪽에도 물방울.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나고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난다. 물방울과 물방울이 서로 부딪힌다. 물방울이 웃는다. 물방울이 물방울의 길을 간다. 보도블록 위는 온통 물방울 나라. 여기도 물방울. 저기도 물방울. 여기저기에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을 바라보는 마음 한쪽에 물방울이 여러 개 생긴다. 무늬가 없다. 다만 깊어 간다. 물방울을 꺼내어 물방울 옆에 놓는다. 물방울이 굴러간다. 데굴데굴 굴러간다. 물방울이 물방울과 물방울의 틈을 지나간다. 틈을 지나가는 큰 물방울, 작은 물방울. 물방울이 아프다. 통, 통, 통, 물방울이 굴러간다. 물방울을 따라 나도 굴러간다. 시간을 깎으며 가는 저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위에 내려앉는 숨결들. 숨결들이 눈을 씻는다.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든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두 눈을 크게 뜬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눈앞 보도블록에 툭, 빗방울이 떨어져 번진다. ‘어, 비가 오네?’ 생각하는 순간, 툭, 툭, 후드득, 빗방울들. 행인들은 걸음을 재촉해 사라지고 ‘보도블록 위에 고요가 한 켤레 두 켤레 쌓인다’. ‘그 고요 위에 물방울이 깨알처럼 쏟아진’단다. 화자는 가던 길도 멈추고 보도블록에 쏟아지는 비에 정신이 팔린다. ‘이쪽에도 물방울. 저쪽에도 물방울.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나고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난다. 물방울과 물방울이 서로 부딪힌다.’ 마치 비를 처음 보는 아이처럼 화자는 신이 나서 몰두한다. ‘여기도 물방울. 저기도 물방울. 여기저기에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처음에는 울고 있던 물방울이 이제는 웃는다. 무슨 일로인지 서럽게 울던 아이가 딴 데 정신이 팔려 울음을 그치듯이. 시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마음으로 비를 바라보랴. 시각적으로도 선명한 이미지에 더해 소리가 쾌감을 주는 시다. 우리글 받침소리 ‘ㅇ’과 ‘ㄹ’의 음성상징을 백분 활용해, 데굴데굴 구르고 흐르면서 그 위에 ‘내려앉는 숨결들’을 씻어주는 둥근 빗방울들을 생동감 있게 노래했다.
#물방울#비#눈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