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정훈]대통령의 비행기 간담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김정훈 사회부장
김정훈 사회부장
“이거 왜 4시간이나 늦게 출발하는 거죠?”(기자들)

“그게 뭐… 이집트 대통령이 방문하게 돼서 공항 의전상 시간이 안 맞아서 그렇다 하네요.”(청와대 관계자)

2004년 12월 7일. 당시 유럽 3개국을 순방한 노무현 대통령이 마지막 방문국인 프랑스 파리를 떠나 귀국길에 오르는 날이었다. 갑자기 대통령 특별기의 출발 시간이 늦춰지면서 기자들이 의아해하자 대통령을 수행한 청와대 관계자들은 엉뚱하게 이집트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을 핑계로 댔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한 뒤 특별기가 어둑한 파리 상공을 벗어난 지 25분쯤 지났을 때 노 대통령이 기자들이 앉아 있던 쪽으로 다가왔다.

“이 비행기는 서울로 바로 못 갑니다.” 노 대통령의 깜짝 선언에 기자들이 술렁거렸다. 한쪽에선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돼 평양으로 가는 거 아니냐’라는 추측도 나왔다. 노 대통령은 “쿠웨이트를 들러 (이라크) 아르빌에 다녀와야겠다”며 비밀에 부쳐온 자이툰부대 방문 일정을 공개했다.

노 대통령은 해외 순방 때마다 자주 기내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자리가 비좁아 어떤 기자들은 맨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받아 적었다.

그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호주에서 귀국하던 박근혜 대통령이 기내에서 기자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노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필자에게는 그때의 비행기 간담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했던 ‘국민과의 대화’ 같은 TV 생중계 토론이나 기자회견을 거의 하지 않았다. 기내 간담회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박 대통령이 국민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국무회의나 청와대 참모회의에서의 발언 형태로 나왔다.

그래서 언론은 이번 박 대통령의 기내 간담회를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다. 박 대통령의 약점으로 지적돼온 ‘소통 부족’이 이제 불식되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나온다. 어찌 됐든 이번 순방에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등 여러 외교적 성과를 거둔 박 대통령으로선 귀국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한마디라도 더 설명하고픈 심정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박 대통령의 여러 모습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아마 2001년쯤일 것이다. 재선 국회의원으로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 대통령은 당시 강력한 대권후보였던 이회창 총재의 독주 체제에 맞서 각을 세우는 일이 잦았다.

하루는 총재단 회의에 참석했던 박 대통령이 도중에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밖에 있던 기자들이 몰려들자 박 대통령은 기자들의 손을 일일이 꼬옥 잡으며 “우리 당이 이렇게 가선 안 된다. 당내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호소에 가까웠던 박 대통령의 즉석 기자간담회는 15분가량 선 채로 계속됐다. 기자 10여 명이 곤란할 법한 질문을 던졌지만 일일이 성의 있게 답변했다. 당시 그의 주장이 맞았든 틀렸든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날의 대화에서 박 대통령이 오랜 은둔생활을 끝내고 왜 정치에 입문했는지 자연스럽게 답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이번 기내 간담회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세월호 참사 이후 잇따른 총리 후보자 낙마 등 하는 일마다 꼬이면서 무기력증에 빠지는 듯했던 박 대통령이 자신감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정치 입문 시절 지녔던 진정성과 되찾은 자신감으로 경제 살리기, 국가 대혁신 등 굵직한 과제들을 풀어나가길 기대해본다.

김정훈 사회부장 jnghn@donga.com
#대통령#비행기 간담회#소통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