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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중현]라스푸틴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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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중현]라스푸틴 신드롬

박중현 경제부장 입력 2014-11-12 03:00수정 2014-11-13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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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경제부장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은 300여 년간 이어지던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막바지에 등장한 악명 높은 요승(妖僧)이다. 농부의 아들인 그는 젊은 날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수도사를 자처하며 사이비 종파를 세웠다. 마법을 쓴 건지, 운이 좋았던 건지 혈우병을 앓던 황태자의 병세를 완화시킨 그는 ‘기적의 승려’로 불리며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이후 러시아 황실을 쥐고 흔드는 최고 권력자가 됐고 황후를 비롯해 최고위 귀족층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나라 꼴을 염려한 황제의 조카사위 등 귀족들은 1916년 12월 16일 암살을 준비했다. 미인계로 파티에 불러내 치사량 10배의 청산칼리를 넣은 술과 음식을 라스푸틴에게 먹였지만 그는 죽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겁에 질린 암살자들이 총까지 쐈지만 숨이 끊어지지 않자 꽁꽁 묶어 네바 강 얼음 밑으로 던졌다. 제정 러시아는 바로 이듬해 혁명으로 종언을 고했다. 라스푸틴은 그 기이한 행적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화, 만화 등에서 자주 불멸의 흑마법사로 등장한다.

죽은 지 100년이 다 돼가는 라스푸틴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들이 최근 몇 년 새 한국의 재계에 떠돈다. 큰 어려움을 겪은 일부 그룹 총수 주변에 그와 비슷한 느낌의 ‘비선(秘線)’ 인물들이 있었다는 게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명석한 두뇌와 말주변, 돈을 불리거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데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는 게 이들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출신 학교, 발탁 배경 등이 불확실하거나 이전에 뭘 했는지 안개처럼 흐릿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속인’ ‘역술인’으로 불린 이들도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책임이 따르는 공식 직함 대신에 ‘고문’ 명함을 선호했다. 그룹 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총수 앞에서 문제 삼거나 멀리할 것을 조언하는 임직원들에게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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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총수가 사법처리를 받거나 경영상 위기를 맞은 그룹 여럿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 무속인은 아니지만 엉뚱한 사업이나 기업 인수합병(M&A)에 과도한 투자를 하도록 총수들에게 조언해 견실한 대기업들을 어려움에 빠뜨린 외국계 컨설팅사, 외국 경영학석사(MBA) 출신들도 ‘현대판 라스푸틴’으로 불릴 만하다.

문제가 터진 뒤 총수들은 하나같이 이들의 실체를 제때, 제대로 알지 못한 걸 크게 후회한다. 왜 미리 몰랐을까. 여러 대기업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이렇게 설명한다. “맨바닥에서 자기 손으로 기업을 일으킨 재벌 1세는 경험상 사기꾼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엄격히 교육받은 2세는 이런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걸 배워서 안다. 그런 과정이 없었던 2세나 주로 3세들 중에서 문제가 생긴다.”

대내외 환경은 불확실한데 난국을 타개하면서 자신만의 성과를 만들고 내고 싶어 하는 2, 3세 오너들에게 월급쟁이 임직원들이 들고 오는 기획안들은 대부분 신통찮고 답답하게만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업성이 불확실하거나 편법과 탈법의 경계를 넘나들더라도 ‘비선 라인’이 내놓는 팍팍 튀는 아이디어에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라는 설명이다.

경제계 일은 아니지만 최근 정치권의 최고 관심 인물인 정윤회 씨 사안에도 역술인 혹은 무속인이 등장한다. 대통령 ‘비선 실세’로 지목돼 온 정 씨가 세월호 참사 당일 만난 역술인 집에 여러 정치인이 드나들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비선, 무속인 같은 말이나 주변 정황에서 왠지 몇몇 대기업에 나타났던 ‘라스푸틴 신드롬’의 냄새가 풍겨 국민은 불안하다.

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


#라스푸틴#신드롬#정윤회#비선 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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