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경제수석의 위험한 ‘엔저’ 인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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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산업부 부장
천광암 산업부 부장
1995년 상반기 한국의 수출은 기록적인 신바람을 내고 있었다. 반도체와 자동차를 앞세운 수출은 단군 이래 가장 좋았다는 ‘3저 호황’에 버금가는 호경기를 구가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사상 최고 기록이 쏟아졌다. YS 정부는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띄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이헌 당시 대통령경제수석은 그해 8월 “안정과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호언했다. 일각에서는 ‘문민(文民) 호황’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이 호황은 오래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수출 증가를 주도한 요인이 ‘슈퍼 엔고’ 현상이었기 때문에 외환시장의 흐름이 바뀌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YS 정부가 낯 뜨거운 자화자찬을 할 즈음 서서히 시동을 걸던 엔저 현상이 본격화되자 한국 경제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 1996년 1, 2월 경상수지는 2개월 연속 사상 최대 적자를 냈고, 4월에는 수출증가율이 26개월 만에 한 자릿수로 주저앉았다. 반면 수입은 계속 두 자릿수 증가율을 이어갔다. 외환시장에는 심각한 달러 기근이 찾아왔고,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엔저라는 거시적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거시적 정책이 절실했지만 YS 정부는 엉뚱하게도 ‘경쟁력 10% 강화’라는 미시적 대책을 들고 나와 기업들을 닦달했다. 결과는 환란(換亂)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라는 치욕이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환란의 기억을 끄집어낸 이유는 환율 문제에 대해 잘못된 대응을 하거나 타이밍을 놓쳤을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지, 경제정책 결정자들이 잊어버린 것 같아서다.

최근 엔저 현상이 지속되면서 자동차 조선 화학 등 한국의 주력 수출산업이 휘청거리고 있다. 그 여파로 한국 경제는 작년 4분기 이후 4개 분기 연속 0%대 성장을 했다. 과거에 비해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가공할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기업들로부터도 협공을 당하고 있어서 상황이 결코 낫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경제정책 결정자들의 상황 인식은 한가하다 못해 낭만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안종범 경제수석은 이달 초 경제정책 브리핑에서 “엔저를 투자 확대의 기회이자 기업 체질 개선을 통한 경쟁력 강화의 기회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말은 우리 기업들이 원가 1%를 줄이려면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를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대기업들의 단가 쥐어짜기에 고통스러워하는 중소협력업체들의 비명소리가 어째서 안 수석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안 수석은 또한 “지금은 가격경쟁시대가 아닌 창조경제시대인 만큼 기술과 아이디어를 통해 경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며 “우리 경제의 활력을 높이고 체질을 개선하는 데 전력을 다할 예정이다”라고 강조했다.

기술과 아이디어를 앞세운 창조경제로 엔저 환경을 헤쳐 나가겠다는 안 수석의 발상은 거시적 증세(엔저 현상)에 미시적 처방(경쟁력 10% 강화)을 했던 YS 정부 경제참모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창조경제가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좋은 영양제일 수는 있지만 영양제로 암을 고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포크는 샐러드를 먹는 데는 안성맞춤이지만 수프를 떠먹는 데는 무용지물이다. 제발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앞뒤가 맞는 엔저 대책을 세우기 바란다.

천광암 산업부 부장 iam@donga.com
#엔저#수출산업#창조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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