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33>결혼한 독신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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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독신녀
―문정희(1947∼)


쉬잇! 조용히 해 주세요
실수하는 재미도 없으면 무슨 인생인가요
상처와 고통이 혀를 태우는
매운 양념으로 비빔밥을 버무리어 땀 흘리며 먹는 것
이것이 결혼인지도 모르겠어요

우연과 우행으로 덜컹거리며
사막도 식민지도 아닌 땅을 걸어가며
어버버! 입술을 더듬거리며
모래바람 끝도 없는 질문 하나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
이것이 행복인지도 모르겠네요

황소 등에 올라탄 쥐처럼 살기 싫어
황소처럼 가다 보니
결혼한 독신녀가 주소입니다

무임승차 비슷하게 따라다니며 밥을 나눠 먹고
가끔 창밖을 함께 바라보는 것도 괜찮을까요
무엇이건 예고도 없이 종점이 다가들고 말겠지만

‘쉬잇! 조용히 해 주세요’, 친정 식구나 친구가 화자의 행복하지 않아 보이는 결혼생활에 충고라도 했던 것일까. 충고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나도 충고하기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면 속으로 중얼거린다. ‘쉬잇! 내가 그렇게 배우는 걸 좋아했으면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화자 역시 남의 간섭이나 충고에 개의하지 않는 사람일 테다. 그러니 이 ‘쉬잇!’은 삶에 대한 회의와 갈등으로 시끄러운 자기 머릿속을 향해 내리는 지시일 테다. 이 결혼은 실수인가? 아아, 일생일대 실수! 화자는 머리를 쥐어뜯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정신을 수습하고 자신을 되찾는다. 하, ‘실수하는 재미도 없으면 무슨 인생인가’! 참으로 대범하고 헌걸차다. 결혼은 어른으로서 살아갈 앞으로의 평생을 결정짓는 인륜대사(人倫大事)다. 그러니 영악하거나 연약한 사람은 안락한 삶을 보장할 평생사업으로 머리를 굴리고 결정할 테다. 그러나 화자는 심지 굳은 처자, ‘황소 등에 올라탄 쥐처럼 살기 싫어’ 결혼한 뒤에도 ‘황소처럼’ 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부에도 명예에도 ‘무임승차’할 생각 없이 반려자를 선택했을 테다. 그런데 가부장 사회에서 결혼의 현실은 여성에게 폭력적이다. 그 인품 좋아 보이던 남자도 남편이 되니 남자의 위신만 앞세우고 아내의 정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무임승차의 이익은 못 누리고 의무만 잔뜩 주어지는 결혼생활에 지쳤어도 화자는 정신의 힘, 유머를 잃지 않는다. 나는야, 결혼한 독신녀! 이것이 내가 선택한 삶!

황인숙 시인
#결혼#독신녀#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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