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세계최강 양궁처럼… 제조업도 ‘텐 텐 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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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 된 제조업, 양궁서 길을 묻다

“일본 경제는 19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제조업 분야에서는 감히 일본과 대적할 나라가 없었다.”

“중국의 산업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해 조만간 조립완성품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을 위협하고, 궁극적으로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된다.”

“과감한 투자의사 결정과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기술 능력이 우리 대기업의 강점이며 경쟁력의 원천이다.…(그러나) 새로운 동력이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럴 가능성도 낮다. 그래서 앞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고 기반을 넓히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을 지낸 안현호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은 저서 ‘한·중·일 경제 삼국지’(나남)에서 한국과 일본, 중국 산업(제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목조목 짚었다.

한때 산업계의 ‘글로벌 리더’를 자처하다 1990년대 이후 침체에 빠진 일본. 하청 생산기지 수준에서 한국과 일본 제조업을 위협하는 추격자가 된 중국.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한국. 이런 상황을 살펴보면 어딘지 한국 스포츠의 효자 종목 양궁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한국 양궁은 세계 최강이지만 중국의 추격이 무섭다. 한국이 금메달을 따낸 올해 인천 아시아경기와 2012년 런던 올림픽 여자 단체전에서도 은메달은 모두 중국이었다. 1970년대까지 양궁 강국이자 선수들이 가장 선호하는 최고 수준의 활 생산국이던 일본을 넘어선 상황도 비슷하다. 조선업은 일본을 추월했고, 중국에 추격받고 있는 대표적인 업종이다.

하지만 한국 산업계와 양궁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한국 양궁은 여전히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지만 한국 산업계는 급변하는 대·내외적 경제 환경에서 위기에 봉착했다. 과연 어떤 차이 때문일까.

단순히 스포츠 종목 하나를 한국의 산업 생태계와 비교하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국 산업계가 30년 이상 세계 1위를 지키는 한국 양궁의 사례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조언한다. 다소 이질(異質)적인 교직(交織)이 될 수 있겠지만 한국 양궁과 기업이 가진 공통점과 차이를 검토하고,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는 방안을 찾아보는 것도 시사점을 줄 만하다.  
▼ 7, 8회 경쟁 거쳐야 대표선발 vs 10년씩 장기납품 無경쟁 ▼

경쟁은 치열하게

“양궁 선발전 특정선수 편향 막자”… 대회때마다 날씨 등 환경 다르게
대기업 - 부품업체 수직계열화… 수주경쟁 없어 R&D투자 소홀


2012 런던 올림픽을 앞둔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이 2012년 7월 강원 원주 제1군수 지원사령부를 찾아 훈련을 하고 있다. 대표
 선수들은 장병 700여 명이 쏟아내는 응원과 야유의 함성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을 익혔다. 동아일보DB
2012 런던 올림픽을 앞둔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이 2012년 7월 강원 원주 제1군수 지원사령부를 찾아 훈련을 하고 있다. 대표 선수들은 장병 700여 명이 쏟아내는 응원과 야유의 함성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을 익혔다. 동아일보DB
한국 양궁은 자타 공인 세계 최강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그랬다. 한국 궁사들은 이 대회 양궁에 걸린 4개의 금메달 가운데 3개를 휩쓸었다.

기보배, 이성진, 최현주로 구성된 여자 대표팀은 단체전에서 중국을 1점 차로 꺾고 금메달을 땄다. 올림픽 양궁 종목에서 단체전이 도입된 1988년 서울 대회 이후 7연속 금메달이었다. 기보배는 개인전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오진혁은 한국 남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개인전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로부터 2년여의 시간이 흐른 2014년 가을. 인천에서 제17회 아시아경기가 열렸다. 그런데 한국 대표 선수들의 얼굴이 싹 바뀌었다.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던 멤버 6명 가운데 남아 있는 선수는 남자 대표팀의 오진혁이 유일했다.

그래도 한국 양궁은 강했다. 정다소미, 장혜진, 이특영이 조를 이룬 여자 대표팀은 ‘당연한 듯’ 금메달을 땄다. 오진혁은 남자 개인전 금메달을 가져왔다. 이 대회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컴파운드에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2개를 더해 한국은 금메달 5개와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따냈다.

누가 봐도 좋은 성적이다. 그렇지만 대한양궁협회는 벌써 2년 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향해 있었다. 장영술 양궁 국가대표팀 총감독은 “아직 올림픽에서 한 번도 달성하지 못한 전 종목 석권(금메달 4개)을 목표로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한경쟁과 공정경쟁 vs 경쟁 없는 ‘장기전속거래’

여기서 의문. 2년 전 런던 올림픽 시상대에 섰던 선수들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여자 대표팀의 기보배는 한 방송사의 해설위원석에서, 남자 대표팀의 임동현은 관중석에서 동료 선수를 응원했다. 이들이 사대(射臺)에 서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현재 여자 양궁 세계 랭킹 1위는 윤옥희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 2관왕인 윤옥희였지만 대표 선발전에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세계 랭킹 2위 기보배 역시 8강에도 오르지 못했다.

남자 대표팀의 터줏대감인 임동현의 탈락도 충격이었다. 임동현은 최종 선발전에서 6위에 그치며 10년 넘게 몸담았던 태릉선수촌을 떠났다.

황도하 대한양궁협회 부회장은 “남녀 모두 1위에서 12위 정도까지는 실력이 종이 한 장 차이다. 이전에도 세계 랭킹 1위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컨디션 때문이라 할 수도 있지만 대표 선수라면 컨디션 유지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양궁의 국가대표 선발 과정은 깨끗하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란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투명하다. ‘원칙에 따른 끝없는 경쟁’이 양궁 국가대표 선발의 모토다. 세계 랭킹이나 과거 성적은 상관없다. 잘 쏘면 뽑히고, 못 쏘면 떨어진다. 여러 차례의 선발전을 거치기 때문에 일시적 행운이 작용할 수 있는 여지도 없다.

양궁협회는 국제대회를 앞두고 매년 대표 선발전을 연다. 4, 5차례의 선발전을 통해 남녀 4명씩의 국가대표를 뽑는다. 1차 선발전을 맑은 날 치렀다면 2차 선발전은 바람이 심한 날, 3차 선발전은 차가운 날씨에 치르는 식으로 매번 대회 환경도 바꾼다. 대표에 선발됐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올림픽과 아시아경기 단체전은 남녀 3명씩만 출전할 수 있다. 최종 3명을 뽑기 위해 다시 2, 3차례의 평가전을 치른다.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나가려면 거의 10개월에 걸쳐 7, 8차례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셈이다. 이 점이 한국 양궁 경쟁력의 원천이다.

여기에서 제조업이 나아가야 할 ‘해답’ 하나가 보인다. 한국 제조업은 대부분 수직계열화를 지향하고 있다. 자동차, 전자, 중공업 분야의 중소·중견 부품업체들은 대부분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필요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보통 한 대기업에 납품하는 부품업체는 다른 회사에 납품하기 어렵다. 기술 유출 등의 이유로 대기업이 거래를 막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청업체로서도 대기업 한 곳에 장기 계약을 맺고 거래하는 것이 낫다. 매번 다른 부품업체와 수주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니 경영 안정 측면에서 유리하다. 생산 효율 면에서도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런 관행이 부품업체의 기술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기업의 요구에 맞는 제품만을 납품하다 보면 중소·중견 기업이 자체 연구개발(R&D)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다. 수주 과정에서 ‘공정하지 않은’ 경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부품업체들이 10년 정도 대기업과 장기 계약을 하다보면 완전히 대기업에 종속된 갑을관계가 되는 경우가 많다”며 “원청업체에 끌려 다니게 되니 자연히 자체적인 R&D 투자에 소홀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수직계열화와 장기전속거래가 경쟁과 기술개발의 장애요인이 된다는 뜻이다.

기업 내부에서도 경쟁 요인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삼성전자 등 일부 기업이 최근 인사평가를 강화해 ‘연공주의’ 관례에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런 움직임이다. 전수봉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은 “(기업에서) 사람이 계속 경쟁하며 성장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며 “기업 리더가 될 만한 인재는 연차에 상관없이 올라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기업 내·외부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역할은 법과 제도를 운용하는 정부, 그리고 기업 스스로의 몫이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은 “선진국 사례를 보더라도 혁신은 개방과 경쟁에서 나온다”며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풍토가 우선 조성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혁신 또 혁신, 양궁과 기업의 ‘공통 생존법’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는 한국 양궁 지도자들의 ‘작은 동창회’다. 많을 때는 30여 명의 한국 지도자가 해외 선수를 지도했다. 이 때문에 한국 양궁의 기술은 해외에 노출된 지 오래다. 한때 한국 선수들이 가장 많은 훈련 시간을 소화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 못지않게 많은 시간을 훈련에 들이는 외국 선수도 많다.

그래서 한국의 훈련은 양보다 질에 중점을 둔다. 다른 나라에서 흉내 내기 힘든 다양한 훈련을 개발하고 또 개발한다. 끊임없는 혁신이다.

양궁은 기술 못지않게 정신력이 중요한 스포츠다. 대한양궁협회는 오래전부터 스포츠 심리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등을 고용해 선수들의 정신 안정을 돕고 있다. 양궁 선수들이 전방 철책선 근무 서기, 공원묘지 돌기, 잠 안 자고 1박 2일 걷기, 번지점프 하기 등의 훈련을 하는 것도 정신력 강화가 이유다. 예전에는 뱀을 입에 무는 일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하지 않는다.

관중이 꽉 찬 야구장에서 활을 쏘는 ‘야구장 훈련’은 이미 고전이 됐다. 관중들의 함성 속에 부담을 딛고 활을 쏘는 경험은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입을 모으는 방법이다.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는 군부대에서 상대편 관중 역할을 맡은 군인들의 야유를 들으며 활을 쏘기도 했다.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는 본인이 대표팀 감독으로 나섰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를 회상했다.

“번지점프를 시켰을 때 남자 선수들은 우물쭈물했는데 여자 선수들이 먼저 용감하게 뛰어내리더라.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자 선수들은 그 대회에서 2개의 금메달을 땄지만 남자 선수들은 1개밖에 따지 못했다.”

강준호 서울대 교수(체육교육과·스포츠 경영학)는 “한국 양궁이 세계 최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장기적인 지원과 엄격한 경쟁 시스템, 경험의 지식화,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라고 말했다.

한국 양궁은 변화를 통해 변화에 대처했다. 세계양궁연맹(WA)은 특정 국가의 독주를 막기 위해 1987년 개인전 288발 기록합산제의 전통을 폐기했다. 쏘는 화살 수를 줄여 ‘약자의 이변’이 일어날 여지를 만든 것이다. 2010년부터는 세트제를 도입해 3발씩 쏘는 승부를 3∼5세트 치르고 있다. 세트 승부라는 변수 때문에 의외의 결과가 종종 나온다. 하지만 한국 양궁은 이런 변화에서도 꿋꿋이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면 엔화 약세라는 경영 환경에 놓인 한국 기업은 어떨까. 조선업은 한때 수주물량에서 독보적인 1위를 질주하다 최근 중국에 수위 자리를 내주고 있는 업종이다. 이에 대해 한 대형조선사 관계자는 “조선소가 크다고 1등인가, 명실상부한 산업계 1등이라면 제일 비싸고 크고 어려운 걸 만들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바다의 정유공장’으로 불리는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FPSO) 등은 중국 조선사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기술이라는 자부심이다. 하지만 이런 분석이 한국 기업이 갖는 ‘위기 진단’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 담력훈련 - 소음훈련… 승자의 함정 이겨낸 힘은 혁신 ▼

변화는 과감하게

한국양궁 견제하려 경기룰 변경… 상상 못했던 훈련 개발해 대응
무시하던 조선업 1위 내주고… 트렌드 못 읽고 아이폰 쇼크 맞기도


특히 이들 ‘고급 선박’의 주요 부품 가운데 국산이 채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속내를 들여다보면 한국 조선업이 중국에 대해 무조건적인 우위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선박의 고급 부품과 소재는 주로 일본과 유럽에서 조달하고 있다.

지난달 한국경제연구원 주최로 열린 ‘중국의 추격과 한국 제조업의 과제’ 세미나에서 이근 서울대 교수(경제학부·경제학)는 “한국 산업이 승자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교수는 “과거 한국 기업은 새로운 시장이나 산업 패러다임이 등장할 때마다 그 흐름에 빠르게 올라타는 성공 공식으로 성장해 왔다”며 “지금 잘나가거나 기술적 우위에 있다고 해서 새로운 트렌드를 무시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한때 스마트폰의 가능성을 간과하다 ‘아이폰 쇼크’를 맞았던 삼성전자, 초기 하이브리드 및 전기차에 미미하게 대응했던 현대자동차 등을 ‘함정에 빠진 승자’의 예로 들었다.

탄탄한 기본기가 ‘스타 탄생’의 원동력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국 양궁의 힘은 탄탄한 기본기에서 나온다. 무조건 활을 잡고 쏘기 시작하는 외국과 달리 한국 양궁 지도자들은 활을 잡기 전에 자세부터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양궁은 레저가 아닌 운동이라는 사고방식이다.

또 초등학교 때부터 강도 높은 기본기 훈련을 받는다. 활과 화살 등 장비를 관리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이때부터다. 어릴 때 참가한 대회의 성적이 좋으면 상급학교에 진학해 양궁부의 주축 선수로 활동하는 전형적인 엘리트 스포츠다.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체육 가운데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가치 판단은 뒤로하더라도, 어릴 때부터 쌓은 선수들의 기본기가 한국 양궁을 이끌어가는 힘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런 기본기 훈련을 산업 생태계에 적용하면 ‘기술력을 가진 부품, 소재 기업 양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산업의 기본기는 결코 강한 편이 아니다. 한국은 독일, 일본 등에 비해 핵심 기술을 가진 부품 및 소재 기업이 현저하게 적다. 규모와 기술력 모두에서 뒤처진다.

이항구 연구위원은 “한국에 큰 규모의 자동차부품업체가 적은 이유는 부품업체들이 계열사를 만들어 매출을 쪼개 스스로 덩치를 줄였기 때문”이라며 “대기업이 되면 받는 불이익이 두려워 규모를 줄이는 ‘피터팬 증후군’이 회사의 성장을 막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술력 투자도 과제다. 이 연구위원에 따르면 독일 부품기업 보쉬의 R&D 투자 규모는 2012년 기준 매출 대비 9%인 데 비해 한국 대표 자동차부품기업인 현대모비스의 R&D 투자 규모는 매출의 1.1%에 불과하다.

탄탄한 기본기를 가진 선수가 많을 때 비로소 ‘스타’가 탄생한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은 선수들은 세계선수권과 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 등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국민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김진호, 서향순, 김수녕, 박성현 등 대회 때마다 신궁(神弓)으로 불리던 선수들이 등장했다. 스타 선수들을 보고 자란 어린 선수들은 저마다 차세대 스타를 꿈꾸며 훈련한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양궁의 스타 계보처럼 산업계에서도 특정 기업의 혁신 성공 사례를 보고 다른 기업이 따라가는 선순환 구조가 있어야 한다”며 “일종의 밴드왜건 효과”라고 말했다.

작은 제도가 키운 한국 ‘활 제조업’의 경쟁력

시대마다 한두 개의 ‘스타 업종’이 국가 경제를 이끌었다는 점에서는 산업계도 비슷하다. 그러나 스타 탄생의 배경은 조금 다르다. 한국 산업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기술적 저변에서 스타 업종이 자생했다기보다는 기업인, 특히 오너 기업인들의 한발 앞선 판단과 투자가 스타 업종을 키운 경우가 많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스마트폰 등이 그 예다. 위기에 놓인 한국 산업계에 다시 기업가정신이 절실한 이유다.

한편 한국 양궁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난관에 부닥쳤다. 미국의 양궁 제조업체 호이트가 최고 품질의 활을 자국 선수들에게만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 남자양궁대표팀 선수들도 이 활을 구입하려 했으나 “팔지 않겠다”는 말에 발길을 돌렸다. 뒤늦게 어렵사리 활을 구했지만 연습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 대회에서는 일본 야마하(현재는 양궁 사업 철수) 제품을 사용한 여자 선수들만 금메달을 땄다.

그해 겨울, 대한양궁협회는 ‘활의 자주화’를 선언했다. 양궁협회는 “1997년부터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국내 대회에서 외국제 활을 사용할 수 없다”는 지침을 내렸다.

처음엔 반대가 있었지만 협회는 밀어붙였다. 시간이 갈수록 국내 활 제조업체들의 제작 기술과 수준이 올라갔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대표 선수들이 국산 활을 들고 참가한 첫 국제대회였다. ‘메이드 인 코리아’ 활을 든 한국 선수들은 금메달 3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따냈다.

현재 한국 활 제조업체인 ‘윈엔윈㈜’은 세계 양궁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메이저 업체로 성장했다.

이 회사의 활은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가 선정한 세계일류상품에 선정되기도 했다. 따로 광고를 할 필요도 없다. 한국 선수들이 이 활을 쓰는 것 자체가 광고다. 서거원 전무는 “세계 톱 랭커의 70∼80%는 한국 활을 쓴다고 보면 된다. 10여 년 전 일을 생각하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제도와 주무 기관의 추진력이 어떻게 관련 산업을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 ‘작은 예’다.

시야를 넓혀 이를 산업계에 적용하면 정부 및 감독기구의 역할과 맥이 닿는다. 이에 대한 전문가의 조언도 있다. 장석인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내년쯤이면 정부는 지금까지 나온 (기업 정책의) 계획과 전략을 실행해야 한다”며 “정책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정부의 실행 능력이 확보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는 실행력을 통해 기업과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고, 기업은 그 신뢰를 바탕으로 투자 방향을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또 이항구 연구위원은 정부 역할에 대해 “새로운 경쟁자가 진입하기 어려운 산업 구조로는 경제 발전이 어렵다”며 “창업을 통해 새로운 플레이어가 클 수 있는 산업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성원 swon@donga.com·이헌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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