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돌려주세요]지방 직장일, 서울 안방서 척척… 아이 낮잠도 재워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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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한국고용정보원의 재택근무제

《 한국고용정보원 직업연구센터 전임연구원 이랑 씨(36·여)는 21개월 된 아들을 둔 ‘워킹맘’이다. 출산 후 6개월간 육아휴직을 하고, 육아기 단축근무를 통해서 아이를 돌봐왔지만 아이가 커가면서 고민도 커졌다.
연차가 높아질수록 일도 많아졌고 금융권에 종사하는 남편은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기 때문에 육아와 가사를 돕기가 어렵다.
하지만 지난달부터 이 연구원의 고민은 말끔히 해결됐다.
고용정보원이 9월 29일 청사를 충북 음성으로 이전하면서 근무시간선택제, 시차근무제와 같은 유연근무제를 확대 시행한 것. 특히 육아나 간병을 하고 있는 직원에게는 재택근무까지 허용했다.
이 연구원도 1주일에 3일씩 재택근무를 하면서 일과 육아를 마음 놓고 병행할 수 있게 됐다. 》

한국고용정보원 이랑 연구원은 일주일에 사흘씩 재택근무를 하며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다. 4일 서울 영등포구 선유로 자택에서 이 연구원이 업무를 보는 동안 아이돌보미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 박영대 기자sannae@donga.com
한국고용정보원 이랑 연구원은 일주일에 사흘씩 재택근무를 하며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다. 4일 서울 영등포구 선유로 자택에서 이 연구원이 업무를 보는 동안 아이돌보미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 박영대 기자sannae@donga.com
○ 집에서 근무해도 OK

청사로 출근하지 않는 날 이 연구원의 일과는 모두 서울에 있는 집에서 이뤄진다. 오전 7시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를 돌봐줄 아이돌보미가 9시에 오면 이 연구원은 컴퓨터를 켜고 급한 업무를 처리한다. 엄마가 오전 업무를 보는 사이 아이는 돌보미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점심시간에는 아이와 엄마가 함께 밥을 먹고, 집 근처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낸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낮잠을 자면 이 연구원은 다시 업무를 시작한다. 아이가 잠에서 깨 엄마에게 놀아달라고 보채면 돌보미에게 아이를 맡기고 집 근처 서울사무소로 가서 일을 한다. 돌보미가 퇴근할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와 아이 저녁을 챙겨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밀린 업무를 마무리하면 하루 일과가 끝난다. 이 연구원은 “출퇴근 시간이 절약되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됐다”며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친정과 시댁 또는 남편의 도움 없이도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고용정보원은 지난해 12월부터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일·가정 양립을 위해 어떤 제도가 필요한지 연구하고,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6개월간의 논의 끝에 재택근무제를 비롯해 근무시간선택제(주 40시간 내에서 근무시간 자율 조정) 등의 제도를 마련했고, 음성으로 청사를 이전하면서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시행했다. 예전부터 시행해 왔던 시차근무제(출퇴근 시간 자율 조정) 역시 4개 유형에서 6개 유형으로 늘려 선택의 폭을 넓혔다. 또 서울과 경기, 세종시 등 15곳의 스마트워크센터에서 근무하는 제도도 함께 운영했다.

이 연구원은 “업무의 대부분은 논문을 읽거나 조사하고, 창의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면서 보고서를 쓰는 것이라 집에서도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다”며 “휴식을 충분히 취하게 되면서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동기 부여도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재택근무를 시행하면 근무 감독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TF는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들의 근무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방안도 마련했다. 일단 재택근무제를 하려면 인사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하고,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거나 육아, 간병 등의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근무 관리도 청사에서 일하는 직원 못지않게 철저히 받게 된다. 다만 재택근무 일수는 해당 직원과 부서장이 협의해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엄격한 과정을 통해 현재 여직원 5명이 재택근무(육아 목적)를 하고 있고, 올해만 50여 명의 직원이 시차근무제 등을 활용했다.

시차근무제를 선택해 오전 7시 반에 출근하고 오후 4시 반에 퇴근하는 전략마케팅팀 김일환 차장(41)은 “예전에는 퇴근 후 학원을 가거나 운동을 하기가 어려웠지만 요즘에는 저녁 시간 활용도가 높아졌다”며 “저녁에 직무 관련 공부를 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 ‘112 캠페인’으로 회식 문화도 개선

고용정보원의 회의 시간은 1시간을 넘겨서는 안 된다. 근로시간을 줄이는 동시에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신속한 결론을 내기 위해 회의 자료는 무조건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공유해야 한다. 연간 180시간이던 시간외근무 한도도 150시간으로 줄었다. 가급적 야근이나 휴일근무를 하지 않고 정규 근로시간 내에 업무를 끝내도록 유도하는 것. 연차휴가 사용을 촉진하기 위해 직원들의 휴가 사용 실적도 부서별 평가에 반영되고 있다.

끝장을 봐야 했던 회식 문화 역시 ‘112 캠페인’을 통해 달라지고 있다. 112 캠페인이란 모든 회식은 1차에서 끝내야 하며, 한 종류의 술로, 2시간만 마시자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술을 마시더라도 2차, 3차까지 가는 회식 문화와 폭탄주를 지양하자는 취지다. 또 저녁보다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식을 하도록 권유하고, 술 권하는 문화 역시 자제하자는 캠페인도 함께 진행 중이다. PC 등 사무기기를 업그레이드해 ‘업무 속도’도 높였다.

유길상 고용정보원장은 “청사가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업무 효율성이 더 떨어질 수 있어 다양한 유연근무제를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며 “직원들이 근무시간과 장소를 선택하면서 직원 스스로 근무 여건을 개선하면 만족도는 당연히 높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직원이 신명나게 일해야 성과도 쑥쑥” ▼
유연근무제 확대시행 유길상 원장


“직원의 행복이 기관의 행복이 되고, 기관의 성과가 직원의 성과가 돼야 합니다.”

유길상 한국고용정보원장(61·사진)은 4일 재택근무 등 유연근무제를 확대 시행한 이유에 대해 “개인과 기관이 함께 발전하는 직장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초과근무를 줄이고 유연근무제를 확대한 이유는….

“직원들이 신명나게 일하는 ‘고(高)성과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다. 회사에 오래 붙어 있는 직원이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연간 근로시간(2163시간·2위)이 긴 편이면서도 노동생산성(23위)은 하위권에 속하지 않나. 근로시간과 생산성은 상관관계가 없다.”

―직원들의 반대는 없었나.

“노조를 비롯해 직원 대부분이 매우 적극적이었지만 일부 고위직들은 부정적이었다. 보수적인 공공기관 특성상 근무 기강이 해이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업무 성격상 유연근무를 할 수 없는 직원들에 대한 형평성 문제도 있었다. 직원이 행복한 ‘고성과 조직’이 되려면 꼭 필요한 제도라고 설득하고, 유연근무 직원들에 대한 성과관리 체계도 철저하게 마련했다.”

―유연근무제 시행 이후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경직됐던 조직문화가 점점 유연해지고 있다. 직원들의 근무 만족도가 높아지고 사무실 분위기도 좀 더 활기차졌다.”

―솔직히 편한 공공기관이 재택근무 등으로 더 편해진 것 아닌가.

“고용 전산망 운영은 장시간 근로를 할 수밖에 없는 업무다. 또 거주 여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으로 청사가 이전하면서 근무 여건이 더 나빠졌다. 이 때문에 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유연근무제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모든 제도를 도입할 때는 철저하게 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제도를 이용하는 직원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간부들의 인식 변화도 중요하다. 간부들에게 ‘직원들이 상사 눈치를 보지 않고 유연근무제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하고, 인사평가 때 유연근무제를 이용한다는 이유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이익도 줘선 절대 안 된다’고 수차례 강조한다. 재택근무가 정착된 것도 간부들의 인식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지방 직장일#재택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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