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혜택 늘고 삶의 질 높아져… 동독지역 기대수명 ‘껑충’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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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1989.11.9]독일 통일후 동서독 주민 달라진 삶

1989년 11월 9일 밤 12시 무렵. 옛 동서독을 가르던 국경 검문소가 개방될 것이라는 소문에 수만 명의 동독인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위협을 느낀 동독 군인들이 국경 문을 열자 동독 주민은 ‘자유’와 ‘희망’을 외치며 서베를린 쪽으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일부는 손에 망치를 들고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최고의 ‘대격변’ 사건으로 꼽히는 베를린 장벽 붕괴가 올해로 25주년을 맞았다. 독일의 통일은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이어졌다. 또 분열됐던 유럽이 통합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7일 베를린 시내에는 장벽 붕괴 사반세기 만에 다시 분단의 상징물들이 세워진다. ‘리흐트그렌체’, 즉 8000여 개의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이 들어 있는 헬륨 풍선으로 만든 ‘빛의 국경’이다. 장벽이 서 있던 약 12km 구간에 설치되는 이 풍선은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기념일인 9일 밤 베를린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의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 연주와 함께 하늘로 날려진다. 자유와 통일을 축하하는 의미다.

○ “통일독일은 인류의 거대한 실험실”

미국 보스턴글로브는 베를린 장벽의 건설(1961년)과 붕괴(1989년)는 “인류의 거대한 실험실”이었다고 평가했다. 독일의 분단과 통일은 이데올로기와 경제, 지배체제의 변화가 주민의 삶을 어떻게 극적으로 변화시켰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생생한 실험실이었다는 것.

독일 통일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동독지역 주민의 기대수명이 늘어난 점이다. 독일의 막스플랑크 인구통계학연구소(MPIDR)는 지난 25년 동안 동독지역 주민의 기대수명이 남성은 평균 6.2년, 여성은 4.2년 늘어났다고 밝혔다.

통일 직전인 1988년 기준으로 동독인의 평균수명은 서독인보다 여성은 3년, 남성은 2년 6개월 더 적었다. 1989년 통일 이후 이 격차는 점차 좁혀져 2011년 기준으로 서독지역 여성은 1개월, 남성은 14개월을 동독인보다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MPIDR 측은 “동독인의 기대수명 연장은 정부체제의 변화 속에 생활환경과 의료서비스의 개선이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나타내는가를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남한 남자의 기대수명은 77.8세, 북한 남자의 65.6세보다 12.2세 더 길었다. 통일 뒤 북한 주민들도 수명이 연장될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로 국경이 사라졌지만 동서독 지역 간에는 여전히 격차가 존재한다. 독일 정부가 지난달 펴낸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보고서는 “독일은 동독지역 인프라 투자와 경제성장에서 커다란 진전을 보였지만 동독지역 생활수준이 서독의 3분의 2 정도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 주간지인 디 차이트 인터넷판과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동서독 간 생활수준 격차를 통계자료와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동독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서독의 66%에 머물고 있다. 또 지난해 동독의 실업률은 10.3%로 통일 뒤 가장 낮았다. 하지만 서독 실업률 6%에 비해서는 2배에 가깝다. 동독 젊은이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아 서쪽으로 대거 이동하는 바람에 동독지역은 인구 고령화에 시달린다. 동독 인구는 1991년 1807만 명에서 지난해 1629만 명으로 줄었다. 동독의 부족한 젊은 인력은 폴란드와 체코에서 충원되고 있다.

○ 동서독 유산이 서로 영향 준 통일 독일

동독 시절 유산의 영향으로 서독보다 더 좋은 지표를 보이는 분야도 있다. 영유아(0∼2세)를 위한 보육시설과 독감 예방주사 접종률은 동독이 서독보다 월등하게 높다. 예를 들어 동독에서는 3세 미만 영유아의 50%가량이 종일 보육시설의 돌봄 혜택을 받고 있지만 서독에서는 그 수치가 24%에 머무르고 있다. 이는 과거 공산당 정권시절 동독 여성은 대부분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보육 시스템과 예방접종을 국가가 책임져 왔기 때문이다.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한 것으로 인식됐지만 25년이 지난 현재 독일은 동독의 유산을 많이 받아들여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은 동독 출신으로 통일 독일의 국가지도자가 된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 사민당과 대연정을 실시한 메르켈 총리는 가족수당, 은퇴연금, 최저임금제 도입 등을 통해 집권 기독교민주당(CDU)을 사회적 유대감과 정부 지원에 좀 더 관대한 정당으로 변모시켰다. 또 미국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군사동맹 관계에서도 더이상 고분고분하지 않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냈고 러시아와도 긴밀한 경제협력 관계를 맺었다.

반면 동독에서 극우정당과 네오 나치 지지율이 높게 나타나는 현상은 우려를 낳고 있다. WP는 “많은 사람이 서구 자본주의 환상에서 깨어났지만 공산주의의 부활을 바라는 이는 없다. 극우 정치인들이 재빠르게 빈 공간을 채워가고 있다”고 경계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베를린 장벽 붕괴#동독#독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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