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30>목마와 숙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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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와 숙녀
―박인환(1926∼1956)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부릅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라디오에서 처음 이 시를 접했던 1970년대가 아련히 떠오른다. 회한에 찬, 어딘지 퇴폐적 감성이 느껴지는 시어들이 가수 박인희의 감성적인 목소리에 실려 낭송되는 시를 들으며 생의 쓸쓸함에 가슴 시렸었다. 술 한 모금 마실 줄 모르고 마신 적 없는 십대들에게 취기를 느끼게 하고 가르쳐준 ‘목마와 숙녀’. 시인 박인환은 사흘간 술을 마신 끝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서른 살에. 너무 젊다. 그는 술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낭만과 센티멘털리즘은 젊음에 어울리는 의상이다. 그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젊은 시인, 도시 서정의 기수로 새겨져 있다.

회전목마를 타면 어쩐지 센티멘털해진다. 비어 있는 회전목마를 봐도 그렇다. 화자는 회전목마가 있는 유원지나 공원의 카페테라스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빈 술병을 쓰러뜨릴 정도로 바람이 불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을 테다. 화자는 근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에’를 읽은 참이다. 소설과 그 작가의 죽음의 내용이 화자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허무감과 고독감의 시린 바람이 회오리친다. 모든 것이 결별을 보여주는 듯한 가을, 깊은 고립감, 화자는 ‘눈을 부릅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단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이….

황인숙 시인
#목마와 숙녀#박인환#황인숙#가을#술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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