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29>먼 풍경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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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풍경     
―황명자(1962∼)

간월산 오르는 길,
입동 오기도 전에
마른 억새풀 서걱이더니
새싹 하나 불쑥 솟았다

길 잃은 어린 초록뱀이다

좁은 등산길 따라
꿈틀꿈틀 몸 옮기는 뱀은
차디찬 골짜기 돌무덤을 찾아들 터,
그조차도 여의치 못하면 얼어 죽을 수도 있으니
얘야, 겁먹지 마라
원래 이 길은 뱀의 길이 아니란다
겨울이 두려운 뱀을 위해
먼저 놀라지 말고
갈 길 내주어야 한단다
불안한 눈빛으로 떨고 있잖니?
불쌍하지 않니?

나조차도 무서워서 돌아가는
거기,
잠시 인적 끊기고
저만치 사라질 동안
길은
먼 데 풍경처럼 까마득하다
뺨에 스치는 바람이 싸늘하고 마른 억새풀 서걱인다.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며 산길을 걷는데 불쑥, 초록빛 작은 뱀 한 마리! ‘좁은 등산길 따라/꿈틀꿈틀 몸 옮기는 뱀.’ 다들 비명을 지르며 우뚝 발을 멈췄을 테다. 하지만 얼마나 작은 뱀인가. 어린애라도 그 뱀보다 백배는 크고 강하다. 그렇잖아도 추워진 날씨에 어찌할 바 모르고 혼자 헤매던 차에 갑자기 무시무시한 생명체들이 나타났으니 뱀이야말로 기겁을 할 일이다. 화자도 뱀이 무섭지만, 어른답게 생각하고 처신한다. 길에서 고양이 한 마리만 보여도 무섭다고 호들갑을 떠는 아가씨를 보면 짜증이 치밀어 “당신이 더 무서워!” 쏘아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가 고양이 공포증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어른이 가만히 있는 작은 동물을 무서워하는 것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는 것이 이만저만 덜떨어져 보이는 게 아니다.

‘불안한 눈빛으로 떨고 있지 않니?/불쌍하지 않니?’ 무서움보다 강한 연민을 가르치며 화자는 아이를 다독인다. 뱀이 ‘저만치 사라질 동안/길은/먼 데 풍경처럼 까마득하다’. 아이와 함께 잠시, 까마득히 펼쳐지는 다른 생명체들의 세계를 지켜보는 화자다.

인터넷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새끼 늑대 사진을 봤다. 그 사진에는 이런 문구가 딸려 있다. ‘당신의 엄마는 오늘 새 코트를 얻었나요? 나는 엄마를 잃었습니다.’ 다른 동물들에게 인간은 ‘진격의 거인’처럼 무한공포 대상이다.

황인숙 시인
#바람#억새풀#늦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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