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민경]놈코어를 아시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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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촌스러운 청바지랑 운동화를 또 촬영하겠다고요?”

“놈코어가 대세잖아요. 뉴욕, 파리, 전 세계에서 놈코어 빼면 유행이라고 할 게 없어요.”

그 지루한 옷들을 또 잡지에 실어야 하나 싶은 반감과 함께 유령처럼 패션계를 떠도는 이 ‘놈’의 실체에 대한 의심이 밀려왔다. 지난여름부터 기획 회의를 할 때마다 패션 기자와 스타일리스트들이 ‘놈코어’를 주제로 물 빠진 청바지와 보잘것없는 운동화를 찍겠다고 했다. 설마 새로운 유행이라는데 뭔가 다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촬영한 사진을 보니 모델이 하이힐과 드레스에 신물이 난 듯 헐렁한 티셔츠에 납작한 운동화를 신고 포즈를 취한 걸로 끝이다. 이런! 20년 전 재활용 박스에 넣어버린 옷들이 마치 포르노의 한 장르 같은 놈코어란 이름으로 되살아날 줄 누가 알았을까.

‘노멀(normal)’과 ‘하드코어(hardcore)’를 더한 신조어인 놈코어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유행의 이름이다. 말 그대로 ‘평범함을 미는’ 것이 특징이다. 오리지널 ‘놈코어’를 알고 싶다면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주인공들을 떠올리면 된다. ‘맨투맨’ 티셔츠에 배바지 스타일 청바지, 야구점퍼와 운동화 차림 말이다. 해외여행 자유화 직후 패키지 관광 때 입은 옷을 다시 꺼내 입어도 최첨단 놈코어가 된다. 뭔가 세련되게 바꾸면 안 된다.

놈코어란 용어는 한 개념 미술 전시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말이 확장되며 ‘대중과 유리된 채 개성을 우선시하던 까다롭고 돈 많은 천재적 엘리트들이 보통 사람들의 삶을 즐기려는 태도’라는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됐다. 그리고 올해 2월 ‘뉴욕매거진’이 ‘놈코어: 스스로를 7억 인구 중 하나임을 깨닫게 된 사람의 패션’으로 정의하자 갑자기 전 세계 멋쟁이들이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 되면 놈코어가 셔츠와 청바지 등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을 고수하는 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윌리엄 왕세손 부부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 등의 스타일을 가리킨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뭘 입어도 뭔가 있어 보이는 슈퍼 엘리트들의 촌스러운 복장 말이다.

멋인 듯 멋이 아닌 일종의 ‘안티 패션’이 유행하자 외국에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놈코어가 서민인 척하는 부호들을 무작정 따라 하는 우스꽝스러운 유행이란 비아냥거림도 있고 신나치 등 극우파 젊은이들의 옷차림이 놈코어와 비슷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예전에 극우파는 스킨헤드에 가죽점퍼 등 외모만으로도 배타적이었는데 최근 대중화 전략에 따라 평범하게 ‘변장’한 결과 엘리트들의 놈코어와 똑같은 모습이 됐다는 것.

한편으론 놈코어가 계속되면 패션도, 잡지도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나 같은 사람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행히(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남들과 다르고 싶어 하는 인간과 패션의 속성이 놈코어를 바꿔놓기 시작했다. 체육복 같던 티셔츠는 드레스만큼 화려해지고 운동화는 유머를 덧붙였다. 헐렁했던 옷들은 과장되게 커졌다. 평범하지 않은 놈코어가 시작된 것이다.

놈코어는 하나의 유행이 어떻게 시작되고 전개되며 변화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물 건너온 유행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현상이다. 무엇보다 놈코어는 옷이 날실과 씨실이 아니라 복잡한 정치사회적 기호로 짜여 있음을 잘 보여준다. 당신이 입고 있는 것이 바로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그러니 어찌 패션이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holden@donga.com
#놈코어#노멀#하드코어#안티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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