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광표]未生과 未熟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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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표 정책사회부장
이광표 정책사회부장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세계지리 8번 문항의 오류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수험생들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의 2심에서 법원은 “8번 문항은 정답이 없는 오류”라고 판결했다. 1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27일 국정감사에서 “피해 학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잘못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래서 상고를 포기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황 장관의 발언을 놓고 “천만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도 하나의 용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잘못된 내용의 문항을 두고 그동안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해 온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참 안쓰럽게 됐다.

논란이 된 8번 문항의 보기 ㉢은 ‘유럽연합(EU)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보다 총생산액의 규모가 크다’는 내용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교육과정평가원은 “교과서와 EBS 교재에 “EU가 NAFTA보다 총생산액 규모가 크다고 되어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해 11월 수험생들의 이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니 무조건 옳다고 믿어야 한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수능 문항을 교과서에서 출제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항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8번 문항을 바라보는 본질이어야 한다.

교육과정평가원은 무엇이 본질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평가원의 대처는 애초부터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에 잘못을 인정했으면 다시 살아났을 평가원의 체면이 이로 인해 많이 망가졌다.

교육부의 상고 여부는 지켜볼 일이다. 상고심에서 판결이 다시 뒤집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판결이 뒤집힌다고 해도 뒤집히지 않는 것이 있다. 8면 문항의 보기 ㉢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 말이다.

이번엔 국정감사에서 파스타 논란이 불거졌다. 2011년부터 올해 7월까지 서울 중구 정동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건물 1층에 있는 파스타 식당에서 평가원 법인카드로 총 4751건에 걸쳐 8억2000만여 원을 결제했다는 것이다. 평가원은 이에 대해 “각종 회의에 참석한 수천 명의 전문가와 교육기관 관계자들이 식사한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공공기관의 설명이니 믿어야겠지만, 3년 반 동안 한 곳의 식당에 무려 8억 원이라니. 설령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해도 한 곳에 8억 원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판단 미숙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파스타 식당에 들러 평가원 사람들이 외부 인사들과 어떻게 식사를 하는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요즘 ‘미생(未生)’이 화제다. 윤태호의 만화 ‘미생’을 읽은 것은 지난해 이맘때였다. 우연한 계기였지만 아홉 권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미생은 바둑에서 삶과 죽음이 결정되지 않은 돌 혹은 그런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미생은 늘 완생(完生)을 꿈꾼다.

내게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인턴사원 장그래가 아니라 오상식 과장이었다. 충혈된 눈으로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처연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월급쟁이. 그가 세계지리 8번 문항 논란과 파스타 8억 원 논란을 접한다면 뭐라고 할까. 퇴근길에 장그래와 함께 소주 한잔 들이켜며 “미생은커녕 미숙(未熟)하기만 한 이놈의 세상”이라고 푸념할 것 같다.

이광표 정책사회부장 kplee@donga.com
#대학수학능력시험#세계지리 8번#황우여#국정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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