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과징금 4년간 1조6000억… 한국기업 준법 경쟁력 떨어져 ‘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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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1>부패없는 대한민국, 지금 나부터
(下) 反부패가 성장동력

국내 한 종합상사 부사장 유모 씨는 2006년 중동의 산유국 오만에서 석유화학 플랜트 공사를 수주한 뒤 오만 국영석유회사 OOC 사장이 소유한 컨설팅업체 측 스위스은행 계좌에 수백만 달러를 입금한 혐의로 올해 2월 현지 1심 법정에서 징역 10년에 벌금 111억 원을 선고받았다. 한때 ‘중동 지역 상사맨의 교범(敎範)’이라 불리던 그는 올해 6월 사직서를 냈다.

법조계는 이 사건이 외국 공무원에게 뇌물을 건네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 미국의 해외부패방지법(FCPA)을 위반할 소지가 있는지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건의 발생지는 오만인데 미국 법 위반까지 고민해야 했던 이유는 뭘까.

○ 4년간 과징금 1조6000억 원 해외로 헌납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등 세계 각국이 담합과 부패 행위의 감시와 처벌을 강화하면서 ‘해외발 준법 리스크(부담)’가 커지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기업이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간 외국으로부터 부과받은 과징금은 1조6000억 원에 이른다. 4년간 시가 3000만 원짜리 승용차 5만3333대를 고스란히 헌납한 셈이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뇌물방지 협약이 정착하면서 직원을 포함해 법인을 처벌하는 것을 넘어 뇌물로 얻은 수익까지 모조리 박탈한다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기적 이익을 목적으로 뇌물을 건네다 향후 사업 기회까지 영구적으로 박탈당할 수 있는 셈이다.

특히 FCPA는 미국 법이지만 외국 기업도 처벌할 수 있는 광범위한 관할권을 설정해 외국 기업들이 줄줄이 걸려들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외국 회사를 포함해 미국 주식예탁증서(ADR)를 발행한 외국 회사도 포함된다. 외국 기업 임직원이 다른 나라에서 뇌물을 줘도 FCPA에 저촉될 수 있는 것이다. 독일 지멘스는 2000년대 초반 중국 러시아 이라크 등 외국 정부 관계자에게 4238회에 걸쳐 총 14억 달러의 뇌물을 건넸다가 미국과 본국에 벌금으로 각각 8억 달러를 물어야만 했다. 한 노르웨이 석유회사는 이란 석유사업과 관련해 현지 공무원에게 뇌물을 줬다. 이 과정에서 ADR를 발행하고 미국 뉴욕 소재 은행계좌에서 뇌물이 2차례 이체된 근거로 과징금 2000만 달러를 냈다.

또 뇌물 제공 행위에 미국 통신망, 은행 전산망을 이용한 것만으로 FCPA 규정 위반에 해당될 수 있다. 다만 기업들이 기소를 면하는 조건으로 각종 제재와 과징금 부과를 선택하기 때문에 판례까지 남는 일은 드문 상황이다. 법무법인 광장의 오택림 변호사는 “뇌물을 주면서 미국 통신망이나 은행 전산망을 조금이라도 이용하면 FCPA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어서 놀랍다. 나아가 국내 기업이 외국 기업과 조인트벤처나 컨소시엄을 구성했는데 불법을 저지른 미국 파트너 기업이 있다면 국내 기업도 FCPA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 공무원의 범위도 넓어 외국 행정부의 대행기관이나 중개업체도 포함된다. 아이티 국영 통신사에 뇌물을 건넸다가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미국 T통신사 사장이 “대행기관의 의미를 명확히 해 달라”며 연방대법원에 상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국내 기업 15곳도 FCPA 적용 대상

미국은 2000년대를 기점으로 FCPA 적용 건수를 대폭 늘리고 외국 기업의 FCPA 위반을 집중 겨냥하고 있다. 현재까지 벌금액 기준 상위 기업 10곳 중 9곳이 해외 기업이었다.

이에 따라 국내 대기업도 미국 FCPA 위반으로 거액의 과징금을 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KT 포스코 SK텔레콤 LG디스플레이 한국전력공사 신한금융지주 등 ADR 발행 기업 15곳은 자연스럽게 잠재적 위험군으로 거론된다. 이들은 미국 밖에서 외국 공무원에게 뇌물을 건네다 적발되면 미국 기업과 동일한 기준으로 처벌될 수 있다.

이미 미국 상장사의 한국 자회사가 FCPA 위반으로 조사를 받은 적은 있다. 미국 금속업체의 한국 자회사인 S사는 한국 제철소 관계자들에게 127만3000달러를 뇌물로 주고 관련 문건과 서류를 폐기한 사실이 드러나 제재금 772만 달러를 물었다. IBM코리아와 LG-IBM이 공무원에게 로비를 벌인 사실이 적발된 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한국과 중국 IBM이 1998년부터 2009년까지 거액의 현금과 향응을 제공했다고 공개했다. 2011년 3월 미국 IBM은 SEC 조사 결과를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은 채 총 1000만 달러를 지급하며 합의하기도 했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조만간 미국이 FCPA 위반으로 한국 기업을 조사하는 상황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준법감시 프로그램 반드시 갖춰야

해외 준법 리스크는 커지는 반면 국내 기업의 대비는 여전히 미흡한 게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체계적인 준법감시(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이를 준수하기 위해 지속적인 활동을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으나 국내 기업들은 그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또 직원들이 비윤리적 행위를 발견했을 때 거리낌 없이 보고할 수 있는 문화와 제도를 최고경영진이 앞장서서 조성하라고 조언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 최명석 변호사는 “미국 법무부나 SEC가 FCPA 위반 행위를 처벌할지를 결정할 때는 준법감시 프로그램을 구축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요소”라며 “고위 임원진의 신념과 명확한 부패방지 정책, 위반행위에 대한 적절하고 명확한 징계 조치, 내부 신고 조사 방안 마련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장관석 jks@donga.com·신동진·최예나 기자
#해외과징금#한국기업#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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