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지 않은 의식… “업무 위해 적당한 급행비 필요” 60%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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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
<1>부패없는 대한민국, 지금 나부터/上 일그러진 자화상

“대한민국은 부정부패 수준이 매우 높은 편이고, 향후 부패가 지금보다 줄어들 가능성도 매우 낮다.”

동아일보가 현대경제연구원에 의뢰해 20대 이상 성인 남녀 802명을 대상으로 한 ‘부정부패 관련 대국민 인식 조사’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응답자 10명 중 9명은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 수준이 매우 높다”고 답했으며, 향후 부패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에도 4명 중에 1명꼴 정도로만 동의했다. 특단의 대책 없이 이대로 간다면 부패후진국의 오명을 당분간 벗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신속한 업무 처리 위해 급행비 필요한 사회”

2년 전 한 고위공직자가 아들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식장이 위치한 1층 은행에서 이 공직자의 계좌로 수억 원이 입금됐다. 하루에 거액이 입금돼 은행에서 금융정보분석원(FIU)으로 자동 통보됐다. 그러나 당시 결혼식을 치른 사실이 알려져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반 국민들로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고액이라고 생각할 법한데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던 이유는 뭘까.

국민 대다수는 원활한 업무 처리를 위해선 적당한 접대와 사례금이 비즈니스 성공의 양념이자 윤활유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설문 응답자의 60.7%가 “원활한 업무 처리를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급행비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러다 보니 업무상 접대와 선물을 용인하거나 때로는 이를 ‘사회적 능력’이라 평가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대표적 사례가 경조사다. 대기업 규제 등 권한을 가진 정부 부처 모 과장의 자녀 돌잔치에 부조금으로 5000만 원이 들어왔다는 사례는 업계의 해묵은 얘깃거리다. ‘거래처 지인 결혼식에 건네는 축의금 액수가 어느 정도면 부적절하게 느껴지느냐’는 질문에 10만∼30만 원 미만(34.9%), 30만∼100만 원(14.8%)이라고 응답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금액이 오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위공직자나 정치인 등이 조용한 결혼식을 치르면 화제가 되는 것은 역설적인 현상이다.

○ 제도 비웃는 은밀한 관행 늘어

최근 들어선 금품이나 향응을 주고받는 것은 물론이고 식사나 교류 자체를 엄격히 제한하는 방향으로 행동 강령과 법규가 정비되다 보니 공무원과 업체 간 교류는 더욱 은밀해졌다. 부패에도 풍선효과가 생겨난 셈이다. 한 기업인은 “결혼식이든 돌잔치든 부친상이든 줄 수 있을 때 힘껏 꽂아준다. 잘 봐달라는 보험료 성격이 왜 없겠느냐”고 말했다. ‘직무 관련자나 직무 관련 공무원에게 경조사를 알려서는 안 된다’는 공무원행동강령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

공직사회에서 골프를 제한하거나 금기시하는 분위기는 있지만 골프 접대는 여전히 이뤄진다. 경력 10년 차의 한 캐디는 “국산 소형차를 타고 골프장을 찾은 인물들에게도 깊은 예우를 갖추라는 지시를 받을 때가 많다. 접대를 받는 쪽은 정작 이쪽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적극적으로 금품이나 향응을 요구하는 공무원이 여전히 존재하고, 여기에 편승해 뒷돈을 대며 이권을 유지하는 행태도 계속 적발된다. ○○청의 한 과장급 공무원은 관련 업체에 “체육대회를 하는데 3만 원대 도시락 100세트를 맞춰주거나 300만 원을 찬조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기관 관계자는 “확인해보니 해당 업체는 고심하다 300만 원을 건넸는데, 이 돈이 어디에 사용됐는지 아는 사람은 조직 내에 없다”고 말했다. 대국민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3명 중 2명꼴로 “약간의 편법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답했다. 2010년 10월 데이비드 패터슨 미국 뉴욕주지사가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공짜 표 5장을 받았다가 6만 125달러라는 거액의 벌금을 문 것과는 대조적이다.

○ 국민 4명 중 1명 “10억 준다면 위법행위 할 수 있다”

응답자들은 부패의 심각성을 인식하면서도 개선이나 자정 노력에는 인색한 편이었다.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다’는 의견에 42.6%가 동의했고, 4명 중 1명꼴로 ‘10억 원을 준다면 어느 정도의 법 위반 행위는 해줄 수 있다’고 답변했다. ‘친구나 지인의 비위행위는 눈감아 줄 수 있다’고 답변한 비율도 47.8%나 됐다.

특히 20대 응답자는 다른 세대보다 응답 비율이 높았다. 아직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지 않은 20대가 다른 세대보다 부정부패에 둔감한 이유는 무엇일까.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천천히 단계를 밟고 올라가기에는 너무나 힘이 들고, 극심한 경쟁 사회 분위기에서 취업난까지 가중되고 있는 게 20대가 마주한 상황”이라며 “빠른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면 작은 잘못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맞물려 부정부패에 둔감한 결과가 나왔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장후석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소한 편법을 방치하면 더 큰 부정부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경제력이 갖춰지지 않은 20대가 다른 세대보다 물질적 유인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법 위반에 더욱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향후 부정부패 방지 노력에 부정적 요소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부정부패 방지를 막을 대책은 어떤 게 꼽혔을까. 처벌 강화가 34.4%로 가장 응답률이 높았다. 시민의식 향상(24.4%), 사회지도층 감시활동 강화(24.4%), 불합리한 제도 개선(18%)이 뒤를 이었다.

장관석 jks@donga.com·신동진 기자
#자화상#부패#부정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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