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상복의 여자의 속마음]<86>‘그 아버지의 아들’을 만들지 않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5일 03시 00분


코멘트
남자는 아내와 한참 동안 입씨름을 해놓고도 그녀의 저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발단은 내년에 고교에 입학하는 아들의 진로 문제였다. 아내는 “당연히 문과”라고 주장했다. 아들을 경영자 또는 법률가로 키우고 싶다는 게 그녀의 소망. 당사자란 녀석은 “모르겠다”며 눈치를 봤다. 엄마의 입김이 느껴졌다.

남자가 보기엔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경영학과 졸업한다고 경영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로스쿨이나 사법시험이 만만한 것도 아닌데. 더구나 부모를 닮아 수학 과학 점수가 높은 아이를 왜 문과로 보내겠다는 것인지. 남자는 인터넷의 신문기사를 보여주었다. 취업 빙하기에 그나마 대접을 받는 게 공대 졸업생이라는 내용이었다. 아내가 눈길도 주지 않고는 말했다.

“공대 나온 남자라면 지긋지긋해.”

문과를 고집하는 아내의 속마음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공대 출신 남편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던 것.

여성에게 친밀감이란, 서로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며 맞장구를 쳐줌으로써 확인하는 감정이다. 경험과 그로 인한 희열, 분노, 슬픔 같은 감정을 주고받으며 친밀감을 다진다. 한데 그런 방식의 친밀감을 가장 가까운 남자에게 적용하려 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것도 데이터로 말하는 데 익숙하며 감정 같은 불확실 변수에는 곤혹스러워하는 공대 출신 남자라면 말이다.

오늘 어땠는지 물어보면 십중팔구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뭐, 똑같지.” 그 한마디 해놓고는 옷 갈아입고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든다. 사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속마음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누가 좋았고 누구는 싫었는지 등등. 가장 친한 사이인데도 왜 그 같은 일상의 디테일을 나누려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남편 또한 그래야 한다고 기대한다.

실망을 거듭한 일부 아내들은 남편 대신 아들에게 희망을 건다. 아들만은 ‘그 아버지의 아들’로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문과를 고집하는 것이다. 감정 표현에 인색하지 않은 훈남으로 키워 주말마다 아들의 팔짱을 끼고 브런치를 먹으러 다니는 미래를 꿈꿔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공감이나 소통 능력은 교육보다는 집안 내력의 산물이다. 대학에서 문과 전공을 한다고 부드럽고 재미있는 남자로 거듭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만에 하나 그런 아들로 키워놓은들, 엄마보다는 여자친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높다. 부드러운 아우라의 매력남을 또래 여자들이 가만두겠는가.

아내도 그 점을 예상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중엔 어떻게 되든 그녀에겐 대화가 통하는, 친구 같은 식구가 하나는 필요한 것이다.

한상복 작가
#친밀감#공감#소통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