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25>맨드라미와 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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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와 나
―김경미(1959∼ )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다 흐린 날씨는 내가
좋아하는 날씨
좋아하면 두통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화단의 맨드라미는 더 심하다
온통 붉다 못해 검다

곧 서리 내리고 실내엔 생선 굽는 냄새
길에는 양말 장수 가득할 텐데
달력을 태우고 달걀을 깨고 커튼에 커튼을 덧대고
혀의 온도를 올리고
모든 화단들이 조용히 동굴을 닫을 텐데

어머니에게 전화한다
대개는 체한 탓이니 손톱 밑을 바늘로 따거나
그냥 울거라
성급한 체기나 화기에는 눈물이 약이다

바늘을 들고 맨드라미 곁에 간다
가을은 떠나고
오늘 밤 우리는 함께 울 것이다      
      

맨드라미는 원래 7, 8월에 꽃을 피우는데 요새는 10월에도 핀다. 여름이 길어진 영향이리라. 사람의 젊음도 길어져서 사오십에도 여전히 젊은 사람이 많다. 그들은 여름에서 곧장 겨울로 넘어가는 듯한 기후처럼 중장년에도 내내 젊다가 곧장 노년으로 접어든다. 어느 날 갑자기 늙어버리는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 테다. 몸은 서서히 늙어왔을 텐데 어쩜 이리도 늙음이 이물스러울까. 한 살 한 살 착실히 나이를 먹으면 고이 늙기 쉬울레라. 하긴, 그러면 뭐 또 좋을까나.

화자는 멜랑콜리한 사람이다. 흐린 날씨를 좋아한단다. 종일 날씨가 흐린 오늘, 차분히 마음이 가라앉아야 하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뒤숭숭하다. 왜 그럴까? ‘화단의 맨드라미는 더 심하다/온통 붉다 못해 검다’니 화자의 두통은 붉다 못해 검은, 마음의 화기(火氣)에서 오는 것이리라. 화자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기를 꾹꾹 누르고 있다. 세 번째 연에서 그 원인이 엿보인다. ‘곧 서리가 내리고’ ‘모든 화단들이 조용히 동굴을 닫을 텐데’…. 그래, 곧 ‘가을은 떠나고’ 또 한 해가 속절없이 지나갈 테다! 화자는 문득 어머니에게 전화를 한다. 여인으로서 선배인 어머니. “엄마, 왜 이리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꽉 막힌 것 같지요?”라는 하소연은 화기가 불러온 이 체기를 훨씬 전에 겪으신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연대감의 발로일 테다. 맨드라미의 꽃말 중 하나는 ‘시들지 않는 사랑’이다. 생에 대한 시들지 않는 사랑을 품은 맨드라미 같은 여인의 10월의 어느 하루가 감성적으로 펼쳐진다.

황인숙 시인
#맨드라미와 나#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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