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도 발로 쓰는 전민재, 37세의 금빛 질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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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장애인亞경기 여자 200m 우승
뇌성마비로 초등학교 19세에 입학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다 하더니…”


스스로 우승을 예감했다. 혹독한 훈련으로 다진 실력이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어서였다.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다던 전민재가 서른일곱의 나이에 장애인 아시아경기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장애인육상의 간판 전민재(사진)는 19일 인천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여자 200m T36등급 결선에서 31초59로 우승했다. 2위 가토 유키(일본·34초56)보다 3초가량 빠른 압도적인 1위였다.

전민재는 결승선을 통과한 뒤 미리 써 놓은 ‘발 편지’를 들고 왔다. 뇌성마비로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은 그는 말을 제대로 못한다. 손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없다. 그 대신 발로 글씨를 쓰고 그 발로 트랙을 질주한다. 장문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힘들고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며 격려와 칭찬을 해 준 박정호 감독님께 감사합니다. 저를 응원하는 가족과 모든 분들의 사랑을 채찍 삼아 더욱 노력하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못생긴 전민재 선수가∼ ㅋㅋㅋ.”

전민재는 다섯 살 때 원인 모를 뇌염으로 뇌성마비가 된 뒤 한동안 세상과 등졌다. 친구들과 동생들이 학교에 갈 때 방 안에 틀어박혀 TV만 봤다. 열다섯 살 때 전민재는 어머니 한재영 씨(63)에게 이런 글이 적힌 편지를 썼다. “엄마, 나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 사춘기가 찾아온 소녀에게 당시의 삶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1996년 열 아홉 살의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전민재는 중학교 2학년이던 2003년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육상을 시작해 곧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전국체육대회 100m, 200m 10연패를 달성할 정도로 국내에서는 적수가 없었지만 국제대회 금메달은 지난해 프랑스 리옹 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0m에서 딴 게 유일했다. 이전까지 두 차례의 아시아경기에서는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를 얻었다. 2008 베이징 패럴림픽에서 200m 4위, 100m 6위에 그쳤던 전민재는 육상선수로는 ‘환갑’이 넘은 35세의 나이에 2012 런던 패럴림픽 100m, 200m에서 각각 2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수준으로 거듭났음을 알렸다. 엄청난 노력에 체계적인 훈련 여건이 마련된 덕분이었다. 어머니 한 씨는 “매일 시간표를 짜서 붙여 놓은 뒤 하루도 안 빼고 훈련했다. 발톱이 빠져 피를 흘리면서도 쉬지 않고 뛰었다”고 말했다.

제자의 ‘발 편지’를 보며 눈물을 흘린 육상 대표팀 박정호 감독(41)은 “(전)민재가 후배이자 동료인 게 자랑스럽다. 민재만큼 성실하고 노력을 많이 하는 선수는 본 적이 없다. 2년 뒤 패럴림픽에서도 분명히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인천 장애인 아시아경기#전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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