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강수진]손편지 마케팅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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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진 문화부장
강수진 문화부장
“산드라에게. 편지와 따뜻한 격려 고마웠어요. 맞아요, 전 결혼했고 아내의 이름은 신디예요. 아들도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저에 대한 사랑 변치 않았으면 해요.”

1963년 존 레넌은 열성팬인 14세 소녀 산드라의 펜레터를 받고 이렇게 친필 답장을 써 보냈다. 당대의 스타는 자신의 결혼 소식에 안타까워할 소녀 팬을 위해 편지 말미에 ‘당신만을 위한 키스’라며 키스 표시(XXXXXX)까지 덧붙였다.

최근 출간된 ‘존 레논 레터스’에는 생전에 그가 쓴 편지들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레넌은 최신식 타자기를 놔두고 손으로 편지 쓰는 걸 좋아했다. 연인에게 보낸 편지도 흥미롭지만 스타가 팬에게 시시콜콜 적어 보낸 답장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머리카락 6개를 동봉할게요. 제 머리카락이 맞다고 아버지를 걸고 맹세해요.” “폴(매카트니)은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조지(해리슨)는 남자 형제 둘에, 누이 한 명이 있어요.”

e메일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시대라는 21세기에도 스타들은 여전히 팬들에게 ‘손편지’를 쓴다.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연루된 배우 이병헌은 직접 쓴 손편지를 소속사 SNS에 띄워 사과했다. 드라마에 출연 중인 감우성은 촬영으로 바쁜 와중에도 손편지를 올렸고, 가수 나윤권도 2년 만에 앨범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팬카페에 손편지로 컴백을 알렸다.

누군가에게 진심을(또는 진심처럼) 보이는 데는 역시 손으로 꾹꾹 눌러쓴 손편지 만한 게 없어서일까. 디지털 시대에 새삼 손편지가 ‘진심 마케팅’ 수단으로 각광 받고 있다. 미국에선 손편지 대필 업체까지 등장했다. 원하는 편지 문구를 e메일(!)로 손편지 업체에 보내면, 편지지에 손으로 써서 지정한 곳으로 보내준다. 가격은 편지지 한 장 기준으로 건당 10달러 정도다.

누가 이용할까? 주 고객은 기업이다. 왜? 소비자들은 광고우편물을 더이상 뜯지조차 않으니까. 한 미국의 손편지 대필 업체는 “손편지는 받는 사람들의 99.2%가 뜯어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며 마케팅 효과를 홍보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한 유명 소셜커머스 업체가 자사 서비스를 이용한 고객에게 손편지를 보내는 마케팅을 시작했다. 1300명 전 직원이 안부 인사와 상품 설명을 직접 쓴 손편지를 일주일에 각각 다섯 통씩 보낸다.

미국 일간지 유에스에이투데이는 올 초 ‘비즈니스 세계로 손편지가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도 “e메일이나 트위터처럼 비용이 사실상 제로인 전자커뮤니케이션 수단과 달리 비용이 투자되는 손편지는 희소하기에 가치를 지닌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손편지의 부활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오히려 손편지마저 스팸으로 전락한 것 같아 씁쓸하다. 이병헌의 손편지에 대해 방송인 김구라는 “그동안 손편지로 재미를 봤는데 이번엔 여론이 싸늘하다”고 했다. “손편지 약발이 다했다”는 비아냥도 쏟아졌다.

손편지의 본질은 시간이다. 받을 사람을 떠올리며 편지지를 고르는 순간부터 손편지는 시작된다. 백스페이스를 눌러 글자를 지울 수 없기에 한 번 더 고심해야 한다. 그렇게 쓴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고, 주소를 또박또박 쓰고, 우표를 반듯하게 붙여 우체통에 넣을 때까지 그 모든 시간이 곧 손편지의 진심이다.

달콤한 마케팅의 약발은 금세 떨어지지만 진심은 오래가는 법이다. 구두상자 속에 모아놓은 빛바랜 옛 편지들처럼.

강수진 문화부장 sjkang@donga.com
#손편지#진심#마케팅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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