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메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허생원과 동이가 걸은 아름다운 길

  • 입력 2014년 10월 13일 10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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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핀 하얀 메밀꽃 사이로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기억. 드넓은 메밀밭에 핀 메밀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짓궂은 흰 나비를 바라보는 소녀처럼 가슴이 뭉클해졌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던 9월의 어느 날,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자 소설가 이효석의 고향인 강원도 봉평을 찾았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히게 한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中


봉평을 감싸 안는 메밀꽃 향기

파란 가을 하늘 아래 10만 평의 메밀 꽃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매년 9월이면 봉평은 만발한 메밀꽃 향기가 사방을 휘감는다. 이효석의 말을 빌리자면 풀 위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 새하얀 꽃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고, 가슴속에 새침하게 앉아 절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감성을 이끌어 낸다.

생애 단 한 번이었던, 너무나도 짧았지만, 그 기억을 평생 담고 살아가는 허생원의 이야기가 애잔하게 마음을 적신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장돌뱅이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만든 하룻밤의 애틋한 인연이 담긴 서정적 작품이다. 허생원은 하룻밤 정을 나눈 처녀를 잊지 못해 매번 봉평장을 찾게 되는데, 장이 끝나고 술집에 들렀다가 젊은 장돌뱅이 동이가 충주집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심하게 혼을 내고 따귀까지 때려 내쫓는다.

그날 밤, 허생원과 조선달 그리고 동이는 메밀꽃 핀 길을 걸으며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허생원은 성서방네 처녀와 있었던 기막힌 인연에 대해 말하고, 동이에게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한다. 동이는 사생아를 낳고 쫓겨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허생원은 동이의 어머니가 바로 자기가 찾는 여인임을 확신하고 혈육의 정을 느끼며 동이를 바라보다 그가 자기처럼 왼손잡이인 것을 확인한다.


일생을 못 잊는 인연

끝이 보이지 않는 메밀밭 사이사이에는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장면을 옮겨놓은 그림이 눈에 띈다. 자분자분 이 길을 걷다 보면 소박한 메밀꽃과 어우러진 소설 속 풍광이 떠오른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소중한 추억을 오랫동안 간직하기 위해 곳곳에 설치된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는다.

메밀밭에서 벗어나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정을 나눴던 물레방앗간으로 발길을 옮긴다. 물레는 ‘쿵덕쿵 쿵덕쿵 찌그덕 찌그덕’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돌아간다. 문득 피천득 <인연>이라는 책에서 “한 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서로 아니 만나 살기도 한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허생원도 이곳에서 사랑을 나눴던 성서방네 처녀를 가슴속에 담아두고 다시 재회하기를 그 얼마나 바랐을까.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中


소설가 이효석을 만나다

메밀꽃밭에서 물에 빠진 허생원을 동이가 업고 건넜던 흥전천 개울 섶다리를 따라 건너편으로 넘어오면 봉평장이 펼쳐진다. 이곳에 허생원이 자주 들렀던 충주집이 위치하고 있다. 장돌뱅이 허생원은 이곳에서 하루의 시름을 모두 털어버렸을 것이다.

봉평장을 둘러보다 보니, 다양한 먹거리들이 눈에 띈다. 출출함을 달래려 이곳의 명물인 ‘메밀국수’를 먹기로 한다. 메밀은 비만 예방과 피부 미용, 고혈압 예방, 이뇨작용 촉진, 간세포 재생의 효능을 갖고 있다. 단백질 함량이 높고 니코틴산과 비타민B1, B2가 많이 들어 있어 영양이 풍부하다. 메밀국수 이외에 메밀로 만든 묵, 전병, 전 등도 별미다.

봉평장에서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이효석 문학관을 만날 수 있다. 문학관의 전망대에 서면 봉평마을의 풍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메밀밭을 가까이서 감상한 것과는 꽤 다른 느낌이다.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겹겹이 쌓인 산 앞으로 수억 송이의 메밀꽃이 한눈에 담긴다.

문학관 뒤쪽으로는 예쁘게 꾸며놓은 작은 문학정원이 있다. 다양한 색의 꽃이 활짝 핀 가운데에 이효석의 좌상이 그 자리를 지킨다. 문학관은 이효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문학전시실과 다양한 문학체험을 할 수 있는 문학교실, 학예연구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 시절인 1925년 <매일신보>에 시 ‘봄’을, 그리고 경성제대 예과 시절에 시 ‘가을의 정서’와 ‘하오’ 등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다. 그러다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살게 된다. 특히, 조선일보가 창간한 잡지 <조광>에 발표한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최근 안재훈, 한혜진 감독이 <메밀꽃 필 무렵>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화제를 몰고 오기도 했다.

문학관에서 메밀밭 반대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가스러진 털을 지닌 허생원의 나귀가 보인다. 이곳은 이효석 생가와 이효석이 평양에서 살던 ‘푸른집’을 복원해 놓았다. 푸른집은 집 전체가 담쟁이넝쿨로 감겨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효석은 넓은 정원이 있는 산장 같은 집에서 거실에 놓인 축음기로 음악을 들으며 아침마다 우유를 마셨고, 토스트에 밀감으로 만든 잼과 버터를 발라 커피와 함께 먹었다고 한다.

“반평생을 같이 지내 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 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가스러진 목뒤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中


기사제공. 엠(M)미디어(www.egihu.com) 라메드, 에디터 김하양 (kss@egihu.com), 포토 권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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