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민경]노출의 품격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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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한 번쯤 세상의 중심에서 패션을 외쳐보고 싶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 10월은 부산영화제에서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이어지는 레드카펫의 출발점이란 의미를 갖는다. 레드카펫은 말 그대로 공식행사에서 귀빈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하는 빨간색 깔개일 뿐이지만 최근엔 배우들과 패션 브랜드, 그리고 미디어가 총력을 집중하는 ‘산업’이 됐다. 그 위에서 배우가 입고 걸친 옷과 보석, 붉은 립스틱과 탄탄한 팔 근육은 연초부터 세워진 계획이며 밀고 당긴 협상의 결과이다. 영화제의 레드카펫은 아주 인기 있는 실질적 개막작이 됐다.

레드카펫의 마력은 빨간 깔개를 걷는 60초 남짓의 아주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배우로서 1년의 성과가 레드카펫 드레스에 따라 ‘베스트’ 또는 ‘워스트’로 평가받기도 하고, 아역 배우에게는 성인 연기자가 되는 통과 의례가 되기도 한다. 레드카펫의 몇 걸음이 배우의 필모그래피 전체만 한 무게를 갖는 것이다. 출연작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배우’가 ‘레드카펫 노출’이란 연관어로 검색 순위를 점령한 뒤 진짜 스타가 돼버리는 건 계산 밖의 효과이긴 해도,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은 아니다. 비주류의 돌발적 퍼포먼스가 힘이 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연기력으로 격찬을 받은 여배우는 섭섭했을 것이다. 프랑스 본사의 엄명으로 수상이 유력한 여배우에게 자사 제품을 입히기 위해 1년 내내 공을 들인 브랜드 담당자는 맥이 빠졌을 것이고, 레드카펫이 영화제의 품격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전신 노출 ‘스타’에게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가 한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출에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용한다. 스타들은 노출 배우와 함께 화제가 될까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속내를 훤히 드러낸 노출의 전략에 심드렁한 대중도 늘어났다. 1999년 배우 김혜수에게 가슴이 깊이 파인 흰색 구치 드레스를 입혀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레드카펫 ‘현상’을 불러일으킨 유명 스타일리스트 정윤기 씨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희애에게 단아하지만 여전히 섹시한 드레스를 스타일링했다(단연 베스트가 아닐까).

“노출은 전혀 문제가 아닌 거예요. 영화와 스타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면, 그게 훌륭한 레드카펫 드레스죠. 스타일리스트로서 제 입장은 김혜수와 김희애 두 배우 사이에서 다른 게 없어요. 복장 규제에 대한 지시를 직접 듣진 못했지만 ‘하필’ 레드카펫에서 드레스 끈이 떨어지고 벗겨지고 넘어지는 어이없는 일이 반복되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은 들었죠.”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레드카펫에서의 노출을 규제한다는 말을 듣고 난 귀를 의심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품격은 정숙한 레드카펫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양성의 인정과 자율성의 전통 덕분이므로. “우리는 드레스에 대해 논의할 입장이 전혀 아니”라는 집행위원장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노출이 사라진 레드카펫을 보며 나는 불안하다. 때마침 한 여대의 학생회가 축제에서의 복장 노출을 %와 cm로 깨알같이 잡은 규제안을 발표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노출과 성범죄, 여성성에 관한 해묵은 논쟁도 놀라웠지만, 검열과 규제가 우리의 내부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 그래서 더욱 지독한 그것이 일상을 조여 오는 듯한 공포를 느껴서다. 옷에 대한 규제는 아주 쉽지만, 효과는 즉각적이며, 상상 이상으로 마음을 위축시킨다. 텔레그램으로의 사이버 망명에 이어 인스타그램으로 패션 망명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나의 모든 근심이 레드카펫의 드레스들을 지나치게 사랑해서 생긴 과민성 증상이길!

김민경 여성동아 편집장 holden@donga.com
#부산국제영화제#레드카펫#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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