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18>쌀 씻는 남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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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씻는 남자
―김륭(1961∼ )

쌀을 씻다가 달이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밤을 밥으로 잘못 읽은 모양입니다 달은, 아무래도 몰락한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변기통 같습니다

아내가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습니다 속이 시커멓게 탄 사내에게 고독이란 밥으로 더럽힐 수 없는 쌀의 언어입니다 문득 살이 운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밤을 밥이라 썼다 지우고, 쌀을 살이라고 썼다가 지우는 사내의 입이 문밖 나뭇가지에 걸립니다

사락사락 밤을 함께 지새울 여자가 있다면 처녀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불보다 물이 부족한 밥입니다 고물 전기밥통 가득 살이 타는 밤입니다

달이 생쌀 씹는 소리가 들립니다       
        


‘밤을 밥으로 잘못 읽은 모양입니다’…. 마음의 허기가 몸의 허기를 부르는 깊은 밤. 밥을 먹겠다고 쌀을 씻는 독신남의 외로운 심사를 밤과 밥, 살과 쌀을 의도적으로 뒤섞으며 펼쳐 보인다. ‘쌀을 살이라 썼다 지우는 사내’라니, 화자 몸의 허기는 따뜻한 밥과 더불어 따뜻한 여자의 살을 향한 것이다. ‘사락사락 밤을 함께 지새울 여자가 있다면 처녀가 아니었으면 좋겠’단다.

성적으로 열리지 않은 처녀의 차가울 몸은 원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경험이 풍부한, 원숙한 여인이었으면 좋겠다는 뜻일 테다. 몸과 마음을 대등하게 주고받을 여인, 화자의 고독을 이해하고 지켜줄 여인. 그렇게도 화자에게는 저의 고독이 소중한 것이다. 한밤에 제 손으로 쌀을 씻어 안치는 처량한 신세라도 ‘아내가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단다.

밥 좀 제대로 먹어보자고 더럽힐 수 없다는 화자의 신성한 고독! 화자를 저 밑바닥으로 끌어당기지 않고 ‘문밖 나뭇가지에’ 달로 걸린 고독! 그런데 불쑥불쑥 물밀듯하는 이 외로움을 어쩔까나. ‘달이 생쌀 씹는 소리를 듣습니다’, 달이 ‘생살’ 씹는 소리를 듣습니다.

‘달은, 아무래도 몰락한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변기통 같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시구가 김륭의 다른 시 ‘밥의 도덕성’에 있다. ‘밥은 여기저기 개밥그릇처럼 뒹구는 얼굴을 화장실 변기 위에 평등하게 앉혀놓는다’

황인숙 시인
#쌀 씻는 남자#김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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