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17>대서(大暑)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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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大暑)
―강웅순(1962∼ )

염소뿔도 녹는다는
소서와 입추 사이의 대서
황경(黃經)이 120에 이르면
물은 흙이 되고
흙은 물이 되며
풀은 삭아서 반딧불이 된다

장마에 돌도 자란다는
애호박과 햇보리 사이의 대오리
토용(土用)이 중복(中伏)에 이르면
씨앗은 꽃이 되고
꽃은 씨앗이 되며
태반은 삭아서 거름이 된다

붉은 배롱나무가
원추형 태양으로 타오르고
벼가 익는 하늘이
파랗게 맨발이다      
       

‘물은 흙이 되고/흙은 물이 되며/풀은 삭아서 반딧불이 된다’, ‘씨앗은 꽃이 되고/꽃은 씨앗이 되며/태반은 삭아서 거름이 된다’…. 자연의 해부학자이며 분석가인 농부의 눈으로 꿰뚫어본 대지의 연금술적인 변환이 언어의 농부인 시인의 손으로 명료하고 아름답게 갈무리됐다.

토용은 토왕지절(土旺之節)이라고도 하는데, 오행(五行·동양 철학에서, 만물을 생성하고 변화시키는 다섯 가지 원소로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를 이르는 말)에서 땅의 기운이 왕성하다는 절기로 입춘, 입하, 입추, 입동 전 각 18일 동안이란다. ‘토용이 중복에 이른’ 대서, 여름 한복판에서 대지는 펄펄 끓고 뭇 생명이 달구어져 들썩거린다. 그것이 기후가 하는 일! 이 시를 마음에 새기면 염소뿔도 말랑말랑해지고 아스팔트도 녹는, 그 어떤 더위에도 휘둘리지 않고, 기꺼이 여름의 열기에 몸을 던질 테다. 섬세함 속에 뜨거움을 간직한, 아름다움이 강단 있는 대지의 시다.

자연과의 교감을 간결하고 맑은 시어로 즐겨 옮기는 강웅순은 계절 감각이 각별한 시인이다. 다음은 가을의 정취가 쓸쓸하니 물씬한 그의 시 ‘혼자서 내리는 비’다. ‘가는 가을비가 숨죽여 내리고 있습니다/꼬부랑 논가에 누렇게 익은 벼에게//가을의 날개들이 은연히 흩어지고 있습니다/억새꽃 손짓하는 하늘 들판 서쪽으로//익숙한 사람들이 구름으로 하얗게 떠났습니다/마른 호박줄기 힘없이 달라붙은 토담길에//늙은 귀뚜라미만 혼자서 까맣게 남았습니다/풀 마당엔 절구통 토방엔 헌 고무신’

황인숙 시인
#대서#강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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