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好통/구가인]乙의 목소리 빠진 ‘영화 상영 표준계약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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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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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에는 ‘갑’과 ‘을’이 있다.

최고 갑은 전체 스크린의 95%를 차지하는 CJ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같은 멀티플렉스다. 하루 평균 2, 3편의 영화가 개봉하는 상황(지난해 기준 907편)에서 스크린 확보는 흥행의 최고 변수다. 또 다른 갑은 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같은 대기업 투자 배급사. 이들이 유통하는 큰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스크린 잡기가 유리하다. 국내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영화 ‘명량’은 CJ엔터테인먼트가 투자 배급한 작품으로 개봉 후 한 달간 상영 점유율이 30∼40%였다.

반면 제작사나 중소형 배급사는 을이다. 특히 중소형 배급사가 유통하는 소규모 영화라면 상영 자체를 보장받기 쉽지 않다. 관객이 드문 이른 아침이나 자정에만 다른 영화와 퐁당퐁당 번갈아 올리다가(교차상영) 얼마 지나지 않아 극장에서 사라지기 일쑤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취향에 따라 영화를 골라 보는 선택권이 제한된다는 문제가 있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일 교차상영 등에 대한 개선안이 포함된 ‘영화 상영 표준계약서’를 마련해 발표하고 3대 영화관 대표들과 ‘공정 환경 조성을 위한 협약’도 맺었다. 영화관의 ‘갑질’을 막겠다는 취지지만 정작 을의 반응은 싸늘하다. 영화제작가협회와 중소배급사의 모임인 한국영화배급사협회는 이번 협약이 “피해 당사자인 중소규모 배급사, 제작사의 의견을 무시한 채 대기업 투자배급사와 멀티플렉스 극장체인이 합의한 내용”이라는 성명을 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문체부가 표준계약서에서 내세운 게 교차상영 금지인데 세부 내용을 보면 사전 합의 시 여전히 교차상영이 가능하다. 영화관이 사전에 이 조건을 요구할 때 거부할 수 있는 배급사가 얼마나 되겠느냐”며 반박했다. 일부 협약 내용과 표준계약서의 조항은 을에게 오히려 더 불리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배장수 제작가협회 이사는 “무료 입장권 조항의 경우 제작사의 수익이 줄기 때문에 2011년 표준계약서에는 ‘무료 입장 불가’로 해놓고선 이번에는 ‘전체 관객 수의 5% 이하’로 완화했다. 결국 멀티플렉스에만 유리한 꼴”이라고 비판했다.

문체부는 “2011년 표준계약서가 유명무실했던 상황에서 새 표준계약서는 실효성을 확보하고 공정성을 보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갑조차 정부의 발표 내용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눈치다. 한 멀티플렉스 관계자는 “이번 표준계약서는 대부분의 영화관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의 상생정책이 생색내기용에 그치지 않으려면 을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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