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上司’는 흔한 일… 승진보다 특기 살려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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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연장의 부메랑]<下>직장문화 - 인사시스템 대변동

#1. 보험사 부장 말년차인 박모 씨(49)는 ‘정년 연장’ 뉴스가 다른 나라 일처럼 느껴진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직장인 치고 임원이 아닌 이상 나이 50을 넘겨 회사에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박 씨는 “정년을 60세가 아닌 100세로 늘린다 해도 우리 같은 직장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며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서 철면피처럼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아 가며 60세까지 ‘쭉’ 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2. 중견 제조업체에 다니는 30대 후반의 강모 씨는 조만간 연금보험 상품에 가입하기로 했다. 앞으로 정년이 연장되고 재직 기간이 길어지면 장기 금융상품에 들기가 수월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강 씨는 “우리 회사도 50대 초중반이면 퇴직하는 경우가 많지만 향후 정년 연장이 정착되면 실제 퇴직 연령도 2, 3년 늦춰질 것으로 보고 있다”며 “두 살짜리 아이가 나중에 대학등록금 지원도 받고, 잘하면 현직에 있을 때 결혼을 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기대했다.

정년 연장은 단순히 근로자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을 몇 년 늘려주는 차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물론 박 씨처럼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젊은 직장인에게는 노후설계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또 정년이 연장되면 그에 맞춰 임금체계에 대대적인 개편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연차가 높아질수록 많은 급여를 받는 지금의 임금 구조를 기업들이 더는 버텨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반적인 직장 문화와 기업의 인사 시스템, 재테크 트렌드에도 큰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2일 금융계 등에 따르면 정년이 60세로 연장되면 직장인들은 노후 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그만큼 더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평균적으로 40대 중반부터 은퇴 이후의 삶을 구상한다고 보면 현재 10년 안팎인 노후 준비 기간이 2∼5년 늘어난다. 또 노년의 소득 흐름이 조금 나아질 여지가 생기고 월급이 나오는 상태에서 ‘제2의 삶’을 준비할 여지가 많아지는 등 여러모로 근로자들에게 유리한 면이 많다.

은퇴 이후부터 연금 수급까지의 소득 공백기가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또 노후자금을 지금보다 안정적으로 굴릴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김진영 신한은행 미래설계센터장은 “지금까지 정년을 코앞에 둔 장·노년 직장인들은 노후 대비 기간이 짧다 보니 급하게 투자해 손실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며 “재직 기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길게 투자할 수 있는 금융상품에 가입해 재미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직장 문화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후배 상사를 ‘모시고’ 일하거나 부하 직원보다 연봉을 적게 받는 등의 직장 내 역전(逆轉) 현상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회사가 그 많은 고령 근로자들을 모두 관리직으로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항아리형’ 또는 ‘역피라미드형’ 인력구조를 가진 기업들에는 ‘발등의 불’이다. 금재호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지금까지는 직원들이 40대 후반이 됐을 때 ‘싹’이 안 보이면 회사가 그냥 내팽개치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그런 직원들에게 독자적인 업무영역을 줘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직원들 역시 모두가 임원을 목표로 뛰기보다는 자기의 고유한 특기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기업들이 고령자에게 맞는 직군들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느냐다. 일단 단기간에 할 수 있는 과제는 아니라는 게 대부분 기업들의 반응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권은 중간관리자급이 많은 구조이다 보니 향후 인력 운용에 대해 고민이 크다”며 “만약 이들이 자발적으로 퇴직하지 않고 늘어난 정년까지 남아 있으려고 한다면 정말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국민은행 김기환 인사부장은 “인력구조의 고령화에 따라 인사 시스템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 중”이라며 “나이 들었다고 무조건 퇴출할 수 없기 때문에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령자에게 맞는 직무를 조속히 개발하지 않으면 정년 연장이 청년 채용 감소 등 부작용을 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황기돈 한국고용정보원 연구개발본부장은 “젊은 직원이 못하는 인적 네트워킹, VIP 고객 응대, 후배 멘토링, 호흡이 긴 사업 기획 등 고령자에게 맞는 직무는 얼마든지 있다”며 “연차가 높아질수록 조직을 통솔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어수봉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정년 연장으로 인한 비용을 기업이 일방적으로 부담하면 사회 전반적으로 일자리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며 “회사는 직무개발과 교육훈련을 강화하고 근로자는 임금체계 개편에 동참하며 충격을 분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재동 jarrett@donga.com·신민기 기자
#정년 연장#직장문화#인사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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