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준비기간 짧아 명퇴압박 거세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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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연장의 부메랑]<上>고용시장 혼란 본격화
노조 “조건없는 60세 정년” 요구… 기업은 인건비 늘어 경영난 가중
50대 근로자들 구조조정 불안감, 전문가 “필연적 선택… 철저 대비”

최근 커피숍을 개업한 유모 씨(54)는 올해 초 28년간 다니던 은행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임금피크제로 전환해 60세까지 일하고 싶어 하던 그가 퇴직을 선택한 것은 은행 측의 ‘압력’ 때문이다. 명예퇴직 신청 인원이 은행의 당초 목표치를 밑돌자 영업실적이 부족한 그가 퇴직 대상으로 거론된 것이다. 유 씨는 “인사팀 후배로부터 몇 번 전화를 받고 나니 더 버티기가 어려웠다”면서 “정년을 연장한다고 하지만 제도 시행 전까지는 구조조정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정년 60세 의무화는 몰려오는 고령화의 먹구름 속에서 한국 경제가 더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선택’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초저출산’(합계출산율 1.3명 미만) 현상이 13년간 지속되는 등 저출산과 어느 선진국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고령화로 한국의 인구는 2026년 이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장년층과 노인들이 더 길게 일하지 않으면 경제가 후퇴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머지않은 것이다.

문제는 짧은 준비 기간 때문에 일부 기업에서는 단기적으로 명예퇴직의 압박이 더 커질 것이란 점이다. 1년 3개월 뒤면 300명 이상 기업에서 정년 60세가 의무화되지만 임금피크제 등 기업 부담을 낮춰줄 제도들은 여전히 ‘권고 사항’으로 남아 있다. 이에 따라 정년 연장이 장년층 근로자의 고용불안을 오히려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 준비 없는 정년 연장

1일 금융권과 기업 등에 따르면 4월부터 노동조합과 임금협상에 들어간 은행들은 정년 연장 사안을 놓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전국금융산업노조가 임금 8.1% 인상과 함께 ‘조건 없는 60세 정년 보장’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정년 60세 의무화’에 따라 임금피크제로 전환할 수 있는 시기를 60세로 늦춰 65세까지 일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은행은 55세부터 임금피크제를 적용해 늦어도 62세까지는 퇴직하도록 하고 있다.

은행을 대표해 협상을 벌이고 있는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 관계자는 “임금피크제 전환 시기를 늦추면 인건비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인사와 채용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중은행들은 하반기에 신규채용을 지난해보다 소폭 늘릴 방침이다. 하지만 올 상반기에는 대부분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고 기존 직원들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도 했다.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를 놓고 잡음이 일고 있는 건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대기업 10곳과 중소기업 30곳의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정년 연장에 앞서 필요한 조치로 ‘임금피크제 도입’을 꼽은 대기업은 80.0%, 중소기업은 50.0%였다. 하지만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한 기업은 대기업 50%, 중소기업 92.3%였다.

현재까지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은 삼성전자처럼 노조가 없거나 SK텔레콤처럼 직원들의 근속연수가 상대적으로 짧은 기업이 대부분이다. 반면 올 4월 8000여 명을 구조조정한 KT는 내년 1월부터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로 했지만 아직 구체적 시행 방안을 놓고 노조와 합의하지 못한 상황이다.

○ 대기업 50대 사무직 “구조조정 거세질까 불안”


임금피크제 도입 등을 둘러싼 혼란이 거듭되면서 몇 년 안에 수혜 대상이 될 50대 이상 장년 근로자들의 불안감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특히 구조조정 압력은 숙련도가 중요한 제조업 생산직에 비해 사무직이나 중소기업 근로자에게 집중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비(非)제조업 근로자의 전체 퇴직자 중 정년퇴직 비율은 13.4%로 제조업 근로자(15.5%)보다 낮았다.

한 대기업 부장급 간부는 “정년이 연장되더라도 노조의 영향력이 강한 대기업 생산직이나 공기업 직원들이 주로 혜택을 볼 것”이라며 “정년을 채우는 직원이 거의 없는 사무직은 오히려 인건비 부담을 줄이려는 회사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될까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근로자의 비율인 ‘자연 퇴직률’이 낮아지는 것도 정년 연장을 앞둔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나설 원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경기침체로 창업, 이직을 위해 자발적으로 회사를 떠나는 이들이 줄고, 정년 연장이 될 때까지 기다리며 최대한 ‘버티려는’ 50대 직원이 늘어날수록 기업은 인건비 부담이 큰 중간 간부급을 대상으로 명예퇴직 등을 추진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의미다.

이지만 연세대 교수(경영학)는 “일부 기업을 조사한 결과 정년이 연장되면 부장 차장급 간부가 2020년에 전체 직원의 40% 안팎으로 늘어나게 된다”며 “정년이 60세로 늘어나면 명예퇴직금도 그만큼 늘기 때문에 기업들이 그 전에 구조조정 등의 조치를 취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정년 연장에 대해 ‘남의 동네 얘기’라는 반응이다. 현재도 정년을 채우는 직원이 많지 않아 정년이 늘어도 혜택을 받는 직원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임우선 imsun@donga.com·신민기·김호경 기자
#정년퇴직#명예퇴직#인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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