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쉬쉬하던 ‘지휘 권력’의 추한 실상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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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신화/노먼 레브레히트 지음/김재용 옮김/824쪽·2만8000원·펜타그램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사이먼 래틀. 저자는 그에 대해 “30대 중반에 세계 최정상 지휘자 반열에 오르면서 단점조차 장점으로 오인받게 됐다”고 평했다. 동아일보 DB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사이먼 래틀. 저자는 그에 대해 “30대 중반에 세계 최정상 지휘자 반열에 오르면서 단점조차 장점으로 오인받게 됐다”고 평했다. 동아일보 DB
대학 때 합창을 했다. 노래하고 싶어 시작했다가 지휘자가 싫어 두 번 중단했다. 첫 번째는 모욕적인 군대식 언사가 입에 밴 이였고, 두 번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단원의 마음을 망설임 없이 짓밟는 이였다.

책장을 넘기다 두 지휘자의 기억이 떠올랐다. 객석 맨 뒷줄에 앉아 지켜본 두 합창 공연 청중 반응은 모두 좋았다. 독일 지휘자 브루노 발터의 말처럼 “연주자들은 지휘자의 악기”일 뿐이다. 서문에 인용한 불가리아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견해도 비슷하다.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작품 외에 무엇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 시간에는 지휘자가 세계의 지배자다.” 좋은 연주를 위해, 골치 아프게 말 안 듣는 악기를 치워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공연장 출구를 나설 때 가끔 궁금해진다. 정말 ‘좋은 연주’였나. 그렇게 큰 갈채를 받을 만했나. 오케스트라를 향한 박수였을까, 지휘자를 향한 박수였을까. 소리는 날마다 다른데 객석 반응은 대개 판박이다. 지휘봉이 멎자마자 100m 경주처럼 냅다 뛰쳐나오는 손뼉, 예닐곱 명의 “브라보!”와 휘파람, 강아지 훈련시키듯 청중의 박수를 조율하는 지휘자의 입장과 퇴장, 마침내 앙코르를 건졌다며 안도하는 환호.

지휘자 한스 폰 뷜로처럼 듣다 말고 뛰쳐나가 속을 게워낼 정도는 아니더라도 듣기 거북한 공연은 적잖다. 완성도와 갈채의 불균형이 마뜩잖은 관객에게 이 책은 속 뻥 뚫어주는 소화제다. 음악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저자는 클래식 음악계 사람이면 누구나 알 법한, 그러면서 누구도 펼쳐놓고 말하지 않는 ‘마에스트로’의 실상을 벌거벗겨 드러냈다.

“지휘자와 음반 프로듀서를 주무르는 에이전트는 순진한 대중 앞에 가짜를 내세운다. 사이비 마에스트로가 지휘대에 넘쳐난다. 지휘업계에서는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왜 저자가 여러 음반사와 소송에 얽혔는지 넉넉히 알 만하다.

지은이가 설명하는 클래식 공연장의 갈채는 음악보다 마에스트로의 권위를 향한, “고도로 세련된 형태의 숭배”다. 지휘봉을 휘저어 음악을 만든다는 ‘이미지’를 전달한 뒤 연주자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빼앗는다는 것. 저자는 “대부분의 영웅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지휘라는 행위는 개인적 이익을 위한 권력 남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꼽은 선봉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요즘 “카라얀 좋아한다”고 했다간 놀림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가 히틀러를 열렬히 숭배한 나치 당원이었으며, 비발디든 차이콥스키든 한결같이 획일적인 세련미만 추구해 우스꽝스러운 모조품 같은 연주만 찍어냈다는 비판은 그의 말년 즈음에야 공론화됐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사람을 움직인다”며 그를 부러워했다. 지금 눈앞의 마에스트로는 카라얀과 다른 ‘진품’일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음악 듣기를 방해하던 허울 몇 개가 치워졌음을 느낄 수 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거장신화#사이먼 래틀#지휘자#권력 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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