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37명과 한무대…” 팔순 老배우 입꼬리가 올라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6일 03시 00분


코멘트

할리우드 진출 1세대 한국배우 오순택, ‘리어를…’ 주인공 맡아 7월 공연

《 팔순의 노배우가 무대에 선다. 제자 30여 명도 함께.
다음 달 12일 시작하는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에서 주인공 미네티 역을 맡은 오순택(81)과 제자들이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명배우 베른하르트 미네티를 위해 쓴 이 작품은 ‘미네티를 연기하는 배우, 오순택’을 위한 작품이기도 하다. 연극이 공연되는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에서 23일 만난 오 씨는 감기 기운이 있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

오순택(가운데)에게서 연기 지도를 받은 배우들이 스승이 맡은 미네티 역의 분신이 돼 수많은 미네티를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선생님이 같은 장면을 반복하며 하나씩 하나씩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치열하게 가르쳐주셨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오순택(가운데)에게서 연기 지도를 받은 배우들이 스승이 맡은 미네티 역의 분신이 돼 수많은 미네티를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선생님이 같은 장면을 반복하며 하나씩 하나씩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치열하게 가르쳐주셨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고맙죠. 나이가 들면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는데 이렇게 무대에 선다는 게. 다들 일정을 쪼개 시간을 내주고….”

제자들은 스승과 한무대에 서기 위해 단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함께 출연하는 배우는 순식간에 37명이 됐다. 이번에 연출을 맡은 이윤택 씨도 그의 제자다. 오 씨는 그레고리 펙, 폴 뉴먼, 톰 크루즈를 배출한 뉴욕의 명문 연기학교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를 졸업하고 서울예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치열하게 지도한 스승을 위해 제자들은 지난해 ‘오순택 연기수업: 칼을 쥔 노배우’(유아트도서출판)를 헌정하며 깊은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국내 초연되는 ‘리어를…’에서 늙은 배우 미네티는 호텔 로비에서 시립극단장을 기다리지만 끝내 극단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미네티는 홀로 겨울바닷가에서 마지막 연기를 하며 사라진다.

“화물선 부두의 시멘트 벽에 기대어 홀로 수평선을 바라보는 늙은 배우가 떠올라요. 미네티의 외로움과 기다림을 어떻게 전달할까 연구하고 있어요.”

극 중 미네티는 연기 때 사용할 마스크까지 챙겨올 정도로 리어 역을 갈망한다. 여전히 리어 역을 꿈꾸는 오 씨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죽은 딸 코딜리어를 끌어안고 리어가 말해요. ‘스테이 어 리틀(Stay a little).’ 우리말로 ‘잠깐만 눈떠 보렴’ 정도가 될까요. 삶과 죽음, 절망을 단 세 단어로 표현해낸 이 대목에 완전히 꽂혔거든요. 리어의 감정을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고요.”

2001년 오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그는 할리우드에 진출한 1세대 한국 배우다. 1967년 미 CBS 방송 ‘앨리윈터의 마지막 전쟁’으로 미국에서 데뷔한 그는 100편이 넘는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영화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1974년)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가 대표작으로 꼽는 TV 드라마 ‘에덴의 동쪽’(1981년)의 중국인 집사 역으로는 당시 ‘그 배역을 할 배우는 오순택밖에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양인으로 할리우드에서 연기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터. 그는 무작정 찾아가 문을 두드린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를 졸업한 덕을 봤을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당시에는 정식 연기 교육을 받은 동양인 배우가 드물었어요. 엑스트라는 안 했어요. 제작진이 엑스트라를 소 떼처럼 다루는 걸 보고 오디션을 봐서 배역을 따내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는 움직임이 있는 정교한 연기를 강조한다.

“액팅 이즈 두잉(Acting is doing), 연기는 움직임이에요. 대사만 읊조리는 게 아니라 움직임과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해요. 이윤택 연출가는 요즘도 가끔 제 수업 장면을 흉내 내요. (두 팔을 아래위로 흔들며) ‘아 에 이 오 우’ 하며 발성 연습을 했다면서요.(웃음)”

그는 배우여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할 거예요. 연기가 재미있어요. 좋아요. 자기 존재가 분명해야 캐릭터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죠. 오묘하고 흥미로워요.”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연습실로 향했다. 미네티의 분신 역을 맡은 제자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7월 12∼19일,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3만 원. 02-763-1268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오순택#할리우드#이윤택#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리어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