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지은]“외로워서 그래, 외로워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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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사회평론가
정지은 사회평론가
주위에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발언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가까운 이에게 물었더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외로워서 그래, 외로워서. 이놈들아, 나 여기 있다. 나 아직 안 죽었다! 나 잊어버린 거 아니지? 그렇게 외치는 건데 네가 몰라주는 거야.”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몸부림이라는 얘기다. 선문답 같았지만 이상하게 그 대답이 묘하게 위로가 됐다.

부쩍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택시 운전사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가 그랬다. 목적지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놀랍게도 꽤 편안했다. 대체 낯선 사람에게 왜 내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20대 때와는 딴판이다. 전혀 모르는 낯선 이가 툭 던진 질문이 내 마음에 파문을 만든 걸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우리는 가끔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깊은 속내를 이야기하게 되나 보다.

감정 노동이 보편화하면서 겉으로는 항상 웃고 다니지만 속마음은 우울한 ‘가면 우울증’(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놀러간 이야기를 올리지만 정작 자신의 속마음은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어도 힘든 얘기, 어려운 얘기를 자주 하거나 섣불리 징징댔다가는 상대방의 기운을 빼앗는 ‘에너지 뱀파이어’로 찍히거나 “또 어려운 얘기 한다”고 타박 맞기 딱 좋다. 상대방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기에는 나도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까. 차라리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고, 흉을 보는 건 괜찮아도 힘든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딱 질색이라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대화는 점점 소통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내가 뭘 봤다, 어디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다는 정보 이야기는 많지만 왜 좋았는지,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서로의 감정과 상황을 공유하고 나누는 대화는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다. 정보라도 나누면 유익하기라도 하지, 우아하고 좋은 말이 서로 오가는데 내용이 전혀 없는 대화는 얼마나 많은가.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칭찬하는데, 뒤돌아서면 어쩐지 칭찬을 들은 것 같지 않은 기분인 거죠. 글러브 낀 화살 같은 말인 거죠. 글러브로 치면 얼굴은 찢어지진 않지만 내장 파열이 오니까요”라는 김려령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그런 대화를 하느니 누구도 어떤 말을 잇지 못하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천사가 지나가는 순간’을 견디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염화보살의 미소를 띠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네네”와 “어어, 알았어”를 연발하는 영혼 없는 대답을 하느니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은 것처럼.

“잘 지내?” 물어보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일단 “그럼, 잘 지내지. 고마워”라고 답해야 하는 영어의 관용 표현 같은 대화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그런 틀에 박힌 반응조차 귀찮아지면 우리는 마치 바쁜 일이 있다는 듯이 손 안의 구세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갈 곳 없는 말과 동의를 구하는 눈빛은 허공을 떠돌고,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의 스마트폰이 연결해주는 자신만의 세계에 접속해 있을 뿐이다.

철학자 루소는 젊었을 때 자신의 후견인이자 연인이었던 바랑 부인과 우유를 탄 커피로 아침식사를 하곤 했는데 “이때가 하루 중 우리가 가장 평온하고 편안하게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바쁠 것도 없이 사랑하는 여인의 눈을 마주 보면서 마시는 부드러운 카페오레 한잔, 생각만 해도 참으로 편안하고 따뜻한 풍경이 아닌가. 루소의 아침식사 시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안한 대화가 그리워지는 주말이다. 오늘 저녁은 그런 친구와 함께 보내고 싶다. 6월의 저녁 바람과 커피 한잔을 함께 나누면서.

정지은 사회평론가
#감정 노동#가면 우울증#SNS#대화#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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